R1 - 03.15

외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정형외과 인계를 받을 때 사진 찍을 일이 많을 거라는 인계를 받고 작년 겨울에 핸드폰을 새로 구입했다. 지금이야 사진 촬영을 할 일이 거의 없지만, 그래도 몇 달마다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정리할 겸 예전 사진들을 보다 보니 전여자친구가 찍어준 사진들을 몇 장 발견했다.


전공의 일기라고 해서 병원과 의학 얘기는 하나도 안 하고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 이제는 연애얘기까지 하려는 게 우습기도 하다. 당연히 자세한 얘기를 하진 않겠지만 처음 그녀를 만난 건 약 1-2년 전 소개로 만났던 분이었다. 소개를 받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것이 4년 정도 되었는데, 그 사이에 한두 분은 만났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으로 만났던 분들이 몇 분 계신데 그중 한 명이었다.


아직도 첫 만남이 기억이 나는 게 밥을 먹고 무슨 정신이었는지 내가 롯데월드를 대뜸 가자고 했다. 그렇게 희한한 시작으로 서너 번 만났지만 그 당시에 나는 연애를 할 생각이 없던 건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모르겠지만 쉽게 관계를 시작하지 못했고 그렇게 1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그분은 남자친구도 생겼다고 전해 들었는데, 헤어진 것이었는지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 그리고 신기하게 소개해준 지인의 청첩장 모임에 같이 참석하게 되어 다시 만나기 시작하고 연애가 시작되었다. 그게 인턴 끝 무렵 겨울즈음이었다.


그분은 한국 무용을 하는 분으로서 단아하고 이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곤 했다. 교회를 막 다니기 시작했지만 코로나로 열심히 다니려는 마음이 한풀 꺾였지만 그래도 열린 마음으로 언젠간 다시 갈 생각을 하곤 했다. 근무가 끝나면 최대한 시간을 맞춰서 만나려고 애썼고 함께 한 시간들이 많이 즐겁긴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결혼을 늘 생각하면서 연애를 하는 사람으로서 괜한 아쉬움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보이는 것에 민감한 직업을 가진 분이라서 그런지 가끔씩 이야기를 나눌 때 너무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농담으로 말했겠지만 “잘 생긴 게 최고야!”라는 말을 해맑게 하는 것을 듣고 어딘가 이질감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것 하나만 가지고 이별을 고한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했던 말은 전공의를 먼 병원에서 시작하게 되면 잘해줄 수 없을 것 같아서 불안정한 마음으로 연애를 하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헤어지자고 했다. 사실 그냥 그녀를 그만큼 좋아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는데. 이제 와서 보면 나는 연애에 대해 아는 것이 정말 없다는 것과, 성숙하지도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연애라는 게 결국 시간을 가지면서 오래 만나봐야 아는 것들이 많은 것인데.


한 가지 느낀 점은 많은 사람들이 전공의는 바쁘다는 것을 알아주고 있기 때문에 가끔 피곤할 때 병원 일이 생겼다는 핑계로 모임을 취소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모두 이해해 주어서 피곤할 때 정말 좋은 구실이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이래서 연애할 때 전공의들이 당직표를 연애 상대에게 보내준다는 것이 꽤나 큰 일이라는 농담도 도는 것 같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과 아쉬움이 있지만 마지막에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한 것이 기억나서 연락처를 다 지워놨다. 나 자신이 멍청하게 다시 연락하지 못하도록. 가끔은 공부 말고도 관계에 대해서도 시간을 많이 할애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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