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2 - 05.09

내분비내과/류마티스내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병동에서 한 환자가 복통을 호소한다고 연락이 왔다. 애초에 복통을 주호소로 입원을 했던 환자인지라, 통증 조절을 위해 진통제 투약을 요청하고는 다른 콜들을 하나둘씩 해결해 나가고 있었다. 대부분 진통제를 투약하면 아무리 못해도 4-5시간은 크게 증상을 재호소 하지 않지만, 30분도 되지 않은 채 같은 환자 연락이 병동에서 다시 온 것이었다.


아무래도 환자를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에 해당 병동으로 빠르게 가보니, 환자는 깡마른 상태로 배만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간암으로 인해 간기능이 심하게 떨어진 상태로, 이에 따라 복수가 계속해서 차고 있어서 유치관 삽입을 예정 중이었다.


이렇게나 중요한 사실을 쏙 빼놓고 연락한 병동이 솔직히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환자 파악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고, 간호사선생님의 연락을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선배의 말을 가볍게 여긴 내 탓으로 생각하고 해당 간호선생님에게 핀잔을 주지 않고, 그저 복수천자 세트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만 했다.


복수천자는 인턴 때부터 워낙 자주 했던 술기라, 큰 걱정과 고민 없이 바로 시행했는데, 바늘을 1센티도 넣지 않았는데, 주사기로 피가 비치는 것을 보고 더 깊이 넣는 것을 즉시 멈췄다. 표면 혈관을 찌른 것이라고 생각하여 바로 밑에 다시 진입을 하였는데, 마찬가지로 1센티도 채 넣기 전에 피가 또다시 비치는 것이었다.


그동안 복수천자 술기를 많이 하지 않아서, 벌써 실력이 녹슨 것인지, 내가 어디서부터 뭘 잘못한 건지 오만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더 하기 전에 당직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 해당 사항을 말씀드리니, 먼저 복부 컴퓨터 단층 촬영을 진행해 보자고 말씀해 주셨다. CT 촬영은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아, 바로 검사를 진행할 수 있었고, 결과를 보니 배에 가득 찬 것은 복수가 아니라 피였던 것이었다.


피가 배를 가득 머금고 있어서, 바늘을 조금만 찔러도 피가 나왔던 것이었다. 영상의학과 당직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 실시간을 진행 중인 출혈인지 먼저 확인을 했는데, 다행히 응급으로 지혈술을 해야 하는 정도의 출혈로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아마 암조직에서 출혈이 조금씩 생긴 것 같고, 그 시간이 오래되어 배를 가득 채운 것 같다고.


복수와 피가 있으면 안 되는 곳에 있다는 것은 결국 몸이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기에, 무턱대고 배에 있는 피를 다 뽑을 수는 없어서, 일단은 1리터만 제거하기로 했다. 그렇게 플라스틱 통에 피가 가득 채워지는 것을 보고 있으니, 이렇게나 많은 소모에도 인간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감사하게도 환자의 활력징후는 안정적이었고, 그렇게 복혈천자를 진행하고 나니 환자의 복통 호소다 훨씬 좋아졌다고 하여 마음 편히 당직실로 돌아가서 밀린 업무를 이어서 진행할 수 있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있었다면 답답함과 분노에 휩싸였을 것 같은데, 병원의 많은 것에 익숙해져 가서 그런지, 마음의 여유가 한결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땐 왜 그렇게 화가 많았던 것이었는지. 업무량과 익숙함에 나아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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