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 04.17

외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아직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한 달 반 정도 당직을 서다 보니 당황하고 설레발치는 모습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학생 시절부터 의학은 너무 방대하고 어렵게 느껴졌지만, 최근 들어 내가 걱정한 것보다 단순한 면도 많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족보만 외우라고 하던 교수님들의 말씀이 제발 이 정도는 알고 가라는 일종의 호소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딱 그 정도 질병만 흔하게 확인되는 수준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또 환자 생명을 위협하는 증상들만 잘 숙지하고 있어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하니, 당직 시간 내에 환자가 갑자기 죽는 일만 없어도 전공의로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한두 시간 일찍 당직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겠지만, 오늘은 시간에 맞춰 일어나서 씻고, 커피를 마시며 혼자 초음파 공부를 이어가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외과이다 보니 주말에 예정된 수술은 없어 병동에서 연락이 올 일이 적은 편이나, 안일하게 생각할 무렵 병동에서 전화가 왔다.


요지는 갑상선 수술을 받은 젊은 여자 환자인데, 목에 멍울이 만져진다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숨이 막히거나, 혈압이 떨어지는 등, 환자의 활력징후에는 변화가 없었고, 다른 특별한 증상도 전혀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환자 진찰을 하러 찾아가 보았다.


흔히 선배님들이 환자를 진찰할 때 환자의 “때깔”을 보라고 하는데,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면 보이는 모습부터 불안정해 보일 거라고 강조해 주었다. 해당 환자는 다행히 평안해 보였고, 추웠는지 환자복 위에 카디건을 입은 채 앉아있었다. 간단하게 동반 가능한 증상들을 물어보면서 환자의 목을 만져보기 시작했고, 정말이지 환자 목 좌측에 약 3㎝가량의 작은 멍울이 만져졌다. 압통이 있던 것도 아니고, 열감도 없었다. 만지는 그 느낌이 부은 림프절 같지도 않아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간 당직을 서면서 갑상선 수술 환자들은 합병증으로 목에 혈종이 생겨 기도를 압박하여 숨을 못 쉬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어, 자칫 응급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당직 교수님께 연락을 드리라는 인계를 받았었다. 그래서 어딘가 이상했지만 교수님께 연락을 드리게 되었다.


당직 교수님 역시 나의 간단한 ‘노티’를 들으시더니 혹 응급 상황으로 번질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셨는지, 단박에 환자를 보러 오셨다. 그렇게 환자 앞에 교수님, 연락을 준 간호 선생님, 그리고 내가 환자 앞에 서 있었다.


교수님께서 목을 만져보시더니 나에게 멍울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셨다. 솔직히 이때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긴장한 채로 내가 만졌던 그 멍울을 가리키니 교수님께서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헛웃음 치시더니 환자에게 대뜸 사과를 하셨다. 그 순간 환자의 목에서부터 내려오는 실리콘 줄이 내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기가 막힐 정도로 카디건에 가려져 있던 헤모박이 옷 사이로 빼꼼 나와주었다. 만져지던 것은 수술 후 발생한 소량의 출혈이 고이지 않게 넣어둔 헤모박일 뿐이었다. 웬만한 외과 수술 후에 당연히 집어넣는 것을 호들갑 떨 듯이 교수님께 연락을 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환자나 보호자는 별일이 아니었기에 평안한 마음으로 쉴 수 있었지만, 나는 쪽팔림에 당직 시간 내내 편하게 쉴 수 없게 되었다. 옆에 있던 간호사 선생님도 머쓱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짓고는 병실을 빠르게 나가셨다.


솔직히 남은 반나절 당직을 어떻게 섰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흔한 교수님들 강의 속 말씀하시는 어이없는 전공의 실수 목록에 한 줄이 된 내가 너무 부끄러웠다. 별것도 아닌 걸로 연락을 주었던 간호선생님이 꽤나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사실상 의사와 간호사의 업무 자체가 다르고, 결국 내가 나의 할 일을 제대로 못한 것이라 할 말은 없었다. 멍청하더라도 안전한 것이 더 좋다고 되뇌려 한다. 혹 이 일로 인해 정말 중요한 순간에 당직 교수님께 연락을 안 하게 될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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