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3 - 03.28

가정의학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호스피스 병동에 또 한 명의 환자가 내원했다. 40대 초반의 남환. 젊은 나이에 암 진단을 받았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치료를 거부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암이 온몸에 퍼져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을 때 응급실을 통해 입원하게 되었다고. 종양내과에서 가능한 치료들을 시행해 보았지만, 더 이상의 항암을 진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하에 완화의료를 위해 가정의학과에 전과되었다.


말기 환자들과의 작업을 통해 죽음의 5단계라는 이론을 정리한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맞이하는 데에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단계들을 거치게 된다고 했다. 해당 모델을 본 환자에 대입해 보았을 때, 그는 현재 부정과 분노 사이 어딘가 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여전히 본인이 말기 암 환자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있어 보였고, 병원 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화를 많이 내니 조심하라는 인계가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여자선생님들에게는 화를 내지 않는다 하여, 완화의료 담당 교수님께서 나에게 회진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해 주셔서 환자를 마주할 일이 며칠간은 없었다. 그럼에도 환자를 계속해서 피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 당직 시간에는 혼자 일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어느 당직날 환자를 마주 하게 되었다.


환자는 당시 상주하던 간병인과 크게 다투어 간병인이 그만두고 떠나기로 했고, 이어서 아버지가 보호자로 오게 되었는데,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아, 환자는 돌연 퇴원하겠다고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와달라는 병동의 연락을 받고 환자를 대면하러 찾아가게 되었다. 환자와 결코 다투지 말겠노라 굳은 결심을 하고 병동에 갔는데, 의외로 환자는 몇 마디 나누고는 덤덤하게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래서 이제는 환자가 마음 정리를 마친 상태가 되어, 호스피스 전문 병원으로 전원 할 때까지 별 탈없이 입원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크나큰 오산이었다.


그 이후로도 환자는 수시로 퇴원하겠다고 화를 바득바득 내고는, 통증이 심해질 때면 약을 달라며 온순해지는 것은 반복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보호자로 있을 때에는 병동 떠나가랴 싸우다가, 아버지가 자리를 비우면 곧바로 간호선생님들과 전공의들을 불러내어 간병인이 해야 하는 수많은 것들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간 이런 만행이 지속되는 것을 보다 보니, 다른 환자들의 입원생활에까지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큰 마음을 먹고 환자를 퇴원시키겠노라 각오를 하고 병동에 갔다. 하지만 그날 마주한 환자의 모습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부종이 너무 심해져서 혼자 움직일 수조차 없던 두 다리는, 앙상하게 말라 있는 그의 팔에 비해 더욱 거대해 보였다. 배는 복수로 가득 차서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고, 두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뒤집혀있어 접신한 사람처럼 새하얀 눈만 드러낸 채 고요히 침대에 기대어 있었다.


환자의 이름을 몇 번 부르니 두 눈이 서서히 돌아왔고, 그때 마주한 그 공허한 눈빛은 사후세계를 본인의 눈으로 직접 경험하던 중에, 이승의 부름에 따라 다시 돌아온 어느 영혼의 모습과도 같았다.


언제 죽어도 놀랍지 않을 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준비했던 그 말들이 하나둘씩 새어나가고 있었는데, 환자가 오히려 먼저 대뜸 사과를 하기 시작했다. 퇴원은 하지 않겠다고. 너무 아프니 모르핀 용량을 좀 늘려 달라고.


그리고는 며칠 뒤 새벽녘에 환자분은 돌아가셨다.


그날 당직이었던 나는 퇴원기록과 사망기록을 작성했고, 병동에서도 늘 하던 대로 환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달려있던 정맥관들을 하나둘씩 제거하고, 필요한 부분은 봉합하고. 마무리가 되어가는 그 모든 시간 가운데 보호자는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보고 있는 중에는 감정을 크게 내비치지는 않았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고생해서 그랬던 게 아니었을지.


그렇게 또 한 명의 환자가 떠났다.


내 아버지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직장이나 미래에 대해 강요하거나 참견한 적이 없었다. 같은 의사임에도 잔소리조차 하시지 않았는데, 딱 한번 해준 이야기는 모든 환자들에게 친절하라는 조언이었다. 환자들은 그렇게 한순간에도 곁을 떠날 수 있으니 필히 긍휼히 여기라고.


뇌졸중으로 10개월간 입원치료를 견디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에 해주신 말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익술 해질 법하면서도 매번 묘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감정에 휩싸일 때도 있고, 때로는 그냥 해야 하는 일로만 느껴지기도 한다.


병실은 결국 또 채워질 것이고, 환자들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퇴원하게 될 것이다. 혹 그 퇴원길이 누군가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남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오는 날인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R3 - 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