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 05.08

소아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잠시 외과 이야기를 다시 하자면, 외과 당직 중에는 전공의로서 병동 환자에 대한 연락만 받는 것으로 교수님들이 지정했다. 아무래도 가정의학과 전공의다 보니 응급 환자에 대한 빠른 대처나 결정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초기 치료가 이미 완료된 입원환자에 집중하게 한뜻이었다. 하지만 지난달 소아외과 교수님이 응급실 업무를 부탁한 날이 있었다. 초저녁 시간에 응급실로 충수돌기염 환아가 내원한 것이었다. 응급 수술이 필요한 상태라서 이미 퇴근한 교수님이 다시 출근을 하고 계셨고, 이에 수술 전에 미리 할 수 있는 것들을 소소하게 부탁하신 것이었다.


부탁하신 것은 단순히 응급 충수돌기염에 대한 수술 동의서를 받아 달라는 요청이었고, 어렵지 않은 일이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환아의 충수돌기가 염증이 심한 상태인 것과, 수술을 하지 않고 항생제를 투약하며 지켜보는 보존적 치료 방법도 있으나, 심할 경우 충수돌기가 터져 장내 물질이 복강 내로 흘러 더 심한 염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복강경 수술을 위해 배가 작은 구멍을 내어 수술을 진행할 것과 추후 경과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마취에 대한 설명 역시도 간단하게 했지만, 이는 마취과 교수님이 따로 진행하게 될 거라 부모가 안심할 수 있을 정도만 설명하고 나는 뒤돌아서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사복을 입은 분이 나에게 어떤 항생제를 쓸 건지 느닷없이 질문을 했다.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잘 모르겠다고 말한 뒤, 머쓱한 마음에 웃으면서 애초에 응급실로 내려오면 안 됐다고 나지막하게 말하고 빠르게 발걸음을 돌렸다. 당연히 소아외과 교수님께서 병원에 도착하면 필요한 처방들을 내실 거라 생각했고, 해당 간호 선생님은 미리 약을 준비할 생각에 질문을 한 것으로 이해했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2년 차 선생님이 내게 면담 요청을 하셨다. 최근에 쓴소리가 오간 교수님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자고.


전날 비뇨의학과 수술 전담 마취과 교수님이 내게 짜증을 낸 일이 있어서, 이에 대한 잔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생뚱맞게 소아과 교수님께서 나에 대한 눈치를 가정의학과 막내 교수님께 주었다는 것이었다. 응급실로 내려갔던 날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당직 중인 소아과 과장 교수님이었던 것이었다. 내가 특별히 밑 보일 행동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꽤나 가벼운 태도로 질문에 대답했던 것이 생각났다.


가정의학과 교수님께 직접 불려 가서 혼나진 않았어도 간이 전공의 재판을 당하긴 했다. 무사히 일단락되었지만, 오늘 이렇게 해당 소아과 교수님을 직접 마주하니 그날의 기분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간호 선생님이라고 생각하고 내심 하대하는 태도로 임했던 것은 아닌지, 나는 권력 앞에 눈치 보는 사람이었는지. 애초에 왜 가운도 입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하지 않고 그렇게 돌려서 꼽을 주는 것이었는지.


이런 일들을 겪은 이야기를 소아과 전공의 친구에게 쏟아 내었는데, 그가 소소하게 위로를 해주긴 했다. 원래 소아과 교수님들이 소심하다 싶을 정도로 깐깐하고 예민하다고. 소아를 보게 되면 자연스레 작은 것들에 민감해진다고.


그래도 해당 교수님께서는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써주셨고, 게다가 특이 심장 판막 질환 케이스가 있으니, 이에 대한 시술을 진행하는 것을 보러 오라고 초대를 해주셨다. 먼발치에서 박동성을 보이는 흑백의 초음파 화면을 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긴 했다.


종종 잊어버리는 사실이, 이 병원 밖으로 나가면 모두 그냥 일반 사람들이고, 다들 좋고 나쁜 점들이 있는 그런 평범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좀 더 큰 그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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