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 05.11

소아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당직을 서게 되면 아무리 편하다 해도 평소에 자는 것보다 못 자게 되는 것이 당연한 건데, 이제야 그 현실이 와닿았다. 최소 인원으로 여러 명이 하는 일을 밤 시간에 도맡아서 해야 하니 자연스레 지치게 된다. 게다가 그 피곤함 때문에 나의 투박하고 거친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나 다른 이들도 힘들게 하는 일을 보다 보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아 진다.


이렇게 못난 모습을 자꾸 보게 되니, 젊은 시절 뭐라도 좀 해보겠다고 하던 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작은 일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세상을 바꾸려던 그 모습. 특히 대학생 때 철없는 열정으로 내 몸을 던져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던 때가 생각난다.


언젠간 돌아보면 위인전에 남겨질 정도의 사람이 될 수 있겠다는 자신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마음들이 현실에 대한 도피성 마음에 기반을 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어딘가를 꼭 떠나서 세계를 품으려는 마음이, 그저 이 자리, 이곳에서 잘 해나가지 못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었는지.


그래서인지 이제는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하지도, 대단한 사람이 되려 하지도 않는 것이 건강한 마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게으르겠다는 것이 아니고, 꿈을 꾸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남들과 같이 평범한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 좋은 삶이었다고 돌아볼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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