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 - 08.05

감염내과 파견

by 그라스데오

인연과 우연. 별생각 없을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말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10년 전 미국에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아르헨티나로 의료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 당시에 같은 지역으로 연수를 오셨던 한 의사 선생님께서 같이 가셨었는데, 그 선생님을 지금 이 병원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게다가 감염내과 파견 전공의를 담당해 주시는 교수님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가지고 계신 그때 당시의 사진들을 보니 추억들이 은은하게 떠올랐다. 아르헨티나의 어느 부족을 찾아 몇 시간씩 운전해 가서 도착했던 외딴 동네. 정말 너무나도 맑은 하늘 아래 찍은 사진 속에선 더욱 맑은 미소들이 가득했었다. 힘들었지만 보람이 있었고, 그 어느 누구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있던 나의 모습도 생각이 났다. 그때에 비해 지금의 내 모습은 참 볼품없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마 그런 열정은 온데간데없어서 그랬던 걸지.


고민이 많이 있어 보인 게 티가 났는지, 교수님께서 식사나 같이 하자고 하셨고, 오랜만에 나의 속 이야기들을 쏟아냈던 것 같았다. 전공의로서의 삶과 그저 한 인간으로서의 삶까지.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결론은 내가 현재의 삶 가운데 길을 잃어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하셨다. 이어 현 삶의 모든 것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가득하다는 것까지도. 게다가 이전에 사람들 사이에 받은 상처가 있는지 슬쩍 물어보시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어려워 보인다고도 했다.


상처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식사를 마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딘가 망가져 있는 나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디서부터 고쳐 나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나의 마음은 꼬여 있었고, 엉킨 실타래 마냥 풀려고 하니 더욱 엉키는 것이 느껴졌다.


늘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것이 순간 많이 부끄러워졌다.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 잘 살고 있는 사람일 텐데.

한참을 걸어온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갈 길은 더욱 남아 있어 보인다. 언제쯤 온전한 평안에 이를지 모르지만, 그래도 오늘부터는 조금은 밝은 모습으로 살아나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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