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였다. 한글이 완벽하지 않을 때였으니 당연히 그림이 주였고, 그림에 대한 한 줄 평 같은 단문이 두어 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서는 일기가 숙제가 되었는데 머리가 굵어진 다음부터는 슬슬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일주일 치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것은 예사 일이 되기도 했다. 일기장에 자물쇠를 달게 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였을 것이다. 사실 내 일기장을 보려고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테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던 이유는 남이 보면 창피할 것 같은 몇 가지의 일들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엄밀히 말하자면 남에게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게 부끄러웠기 때문일 경우가 훨씬 많았다.
'내가 왜 그랬지?'를 시작으로 내가 저지른 일이나 내가 한 생각을 '남에게 보이기도 싫어.' 가 아마도 맞는 이유일 것이다.
실수를 하고, 후회를 하고. 다시는 그렇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서도 또 실수를 하고, 또 후회를 하고.
나도 보기 힘든 일상의 단편들이 남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감당이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은 부실한 자물쇠 하나로 봉인된 듯 싶었다. 그리고 그런 부끄러움의 과정을 여러 번 겪고 우연히 보게 된 나와 같은 모양을 한 사람을 공감하게 되고, 그를 위로하면서 나를 위로 하고 또 그런 과정을 여러 번 겪고 나면서 나는 어른이 되고 있었다. 실수를 하고 부끄러워하고, 다른 이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고, 위로를 하고, 위로를 받으며 어른이 되고 있었다.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나를 마주하기'를 그렇게 매 순간 반복하며 과거의 어린 나를 깨며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는 반추의 영화이다. 그것이 후회인지, 향수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전의 영화에서는 사뭇 자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의 영화에서는 꾸준하게 가장 보기 싫은 루저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들의 모습이 꼴 보기 싫거나 추악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 인물에 대한 연출자의 연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개의 경우 홍상수 본인의 모습을 입체화 했다는 이야기들이 있으면서부터는 그의 영화는 마치 남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은 짜릿한 스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짜릿함이 이내 손발이 오글거리는 과거의 내 일기장을 보는 것 같은 '쪽팔림'으로 감정의 전이가 일어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영화 밖의 그가 영화 속 모지리들로 형상화시켜 놓은 그 인물들에서 슬슬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주인공은 똑똑하고 어린 여자를 보면서 "너무 예쁜데 조심해야 해."를 마치 주문처럼 왼다. 이 주문은 영화 초반에 등장하면서 주인공 남자의 특징과 앞으로 전개될 남자의 갈등을 암시하게 된다. 남자는 그러니까 '금사빠'인 것이다. 좋게 말하면 로맨티시스트이고, 현실적으로 보자면 바람둥이 유부남으로 항시 외도의 위험에 노출된 사람인 거다. 이런 설정에서 관객의 부류도 나뉘기 시작한다. 그의 행동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 댈 것이냐 아니면 인간적 본능으로 그의 행동에 연민을 느낄 것이냐.
영화 속의 그는 이성과 감정의 괴리에서 갈등하는 아주 보편적인 인간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나름의 절박한 사정에 의해서 결혼을 했고(물론 결혼의 이유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가 그의 상황을 변호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 일 수도 있다.) 아이가 둘이나 있는 가장이다. 사회적인 입장에서 그는 가정에 충실해야 하며 다소 개인적인 감정은 이성에 의해 통제하면서 건강한 가정을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마르지 않은 정서를 가진 로멘티스트이기 때문에 쉽게 유혹당하고 항상 선택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회에서 부여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본성에 충실한 감성적 인간이어야 하는가? 이미 유혹에 반 이상 넘어간 자신으로 보자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고집하는 것은 일종의 위선일 수도 있다. 칸트주의자들은 유혹을 당한 시점부터 그를 위선자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성을 접고 감정에만 충실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영화는 그의 이러한 갈등을 관객과 함께하고자 한다. 세상을 살면서 이성과 감정의 괴리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지 인간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러한 선택적 갈등에서 고민하는 인간을 모지리, 찌질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홍상수는 근래 몇 년 동안 굉장히 친절해졌다. 굉장히 너그러워졌다. 이 영화에서 그는 표면적으로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고 하고 있지만 '지금'과 '그때'를 나란히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답을 묻고 있다. 아주 친절하게도 "나의 생각은 이런데 당신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관객은 이런 그의 질문에 냉큼 답을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답을 하든지 간에 뒤이어 오는 또 다른 질문을 관객 스스로 하게 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지금이 맞다"고 한다면 "그러면 당신은 과감한 바람둥이시군요, 사회적 약속 따위는 과감히 깨버릴 철없는 감상주의자일 수도."라는 답이. 반대로 "그때가 맞다"고 한다면 "그러면 당신은 위선자입니다. 자기를 속이는 가면을 쓴 음흉한 사람입니다."라는 답이 스스로에게 또 다른 질문을 남길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겁하게도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을 수 있습니다."라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은 '중용'의 미덕을 가진 대답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가슴 안 구석에는 뭔지 모를 찝찝함이 남을 것이 것이다. 그리고는 부실한 자물쇠로 자신의 대답을 잠가 놓을지도 모른다.
홍상수의 영화는 사실 보기 불편한 영화이다. 굳이 들춰낼 필요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기저층을 들쑤셔놓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나를, 마주 보는 일'을 하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