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아웃
가장 즐겨 듣는 가요 장르는 이별을 절절하게 노래하는 슬픈 발라드다. 대개의 사람들이 놀라기도 하지만 모닝콜도 슬픈 발라드다. 저릿저릿한 가사들이 귀에 꽂히는 순간 정신이 든다. 가사의 전개 과정이나 묘사를 분석해 듣는 것도 좋아한다. 노래 가사에 맞춤하게 어울리는 가수의 목소리가 더욱 이별의 슬픔을 절절하게 느끼게 되는 순간이면 기꺼이 하던 일을 멈추고 슬픔에 나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 슬픔에 '투자'라는 단어가 어색해 보이는가?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어린아이 시절에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단순한 역할만을 수행한다. 울고, 보채고, 불만에 대한 반응이며, 우울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단순한 사실에만 반응하는 어린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은 기쁨이다. 기쁨은 모든 감정의 대장 노릇을 한다. 다른 감정들의 역할을 지휘하며, 아이의 감정에서 가장 우월하고 우수한 존재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의 역할 점점 축소되면서 가장 부정적인 역할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존재에 대한 의심마저 들게 한 슬픔이 대두되기 시작하는 때가 오게 되는 데 이때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질풍노도의 시기. 즉 사춘기이다. 단순한 감정의 변화는 점점 복잡하게 변화하면서 표현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감정의 변화는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인물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얼마나 절망적인지 그동안 쌓아왔던 즐거운 기억들이 모두 소멸될 정도이며, 애써 기쁜 추억으로 저장해 두었던 기억들도 그 포장을 벗고 사실 그대로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점점 빠르게 슬픔의 감정은 절정에 치닫게 되고 마침내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아는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게 되는 데 이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격한 슬픔을 겪고 난 이후 자아의 세계는 새롭게 구축된다. 기쁨에는 항상 슬픔이 섞이고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기억의 양이 늘어난다. 단순히 기쁘고, 단순히 슬픈 기억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이 뒤섞여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슬픔을 겪어내고 난 다음에 느껴지는 후련하고 해방된 듯한 감정의 상태를 우리는 카타르시스라 부른다. 고대 희랍어로 '배설'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 단어는 부정적인 감정의 표출 이후에 겪게 되는 해방감처럼 느껴지는 기쁨의 상태를 일컫는다. 단순한 감정의 변화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감정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화에서 이런 감정상태를 가장 크게 느끼게 하는 공연 예술의 형태로 굿을 들 수 있겠다. 특히 망자의 한을 풀어 주는 살풀이 굿의 종류를 보면 무당의 주도로 관람자들은 슬프고 서러운 감정의 극한까지 치닫게 된다.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쌓인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정신을 잃을 정도의 극한의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망자와 접신한 무당이 망자의 한을 풀어주고 망자가 산 사람들에게 남기는 희망의 메시지까지 듣고 난 후의 관람자들의 감정 상태는 더 없이 평온한 감정의 상태를 갖게 된다. 마치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은 듯한 관람자들은 전에 있었던 극한의 슬픔이 언제 있었냐는 듯 같은 감정을 공유한 이들과 연대하면서 슬픔으로의 해방에 이어 충만한 기쁨의 정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슬픔의 선행이 없고서는 이룰 수 없는 달콤한 행복의 감정. 이러한 감정은 이전의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된다.
비단 문화예술 공연의 형태로만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주변에서 흔하게 보게 되는 막장 드라마의 시청률 고공 행진이라든가, 가십거리로 수다를 떨며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 등은 기꺼이 불쾌한 소재들로 하여금 나의 감정을 슬픔과 분노로 물들게 한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시청자라든가 남의 욕만 하는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이들, 유명인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면서 비난으로 일색 하는 이들을 단순히 변태 혹은 성격이상자로 지칭할 수 없는 이유는 슬픔의 역할에 있다. 굳이 장려할 만한 행위들은 아닐지라도 아주 이해 못할 일들은 아니라는 얘기다.
슬픔을 느끼고 슬픔을 표현하는 것에 유독 인색한 사람들이 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관찰해 보면 기쁨의 표현에도 소극적이며 기타 다른 감정의 표현 역시 서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편하게 소심한 성격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슬픔을 대하는 용기가 부족한 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순간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에 빠져 스스로 극복해 낼 수 없었던 경험이 있었거나 슬픔의 감정 이후 긍정적인 효과를 경험해 보지 못해서 슬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거나. 기쁨의 감정과 마찬가지로 슬픔 역시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가 그 깊이를 크게 한다. 크게 기쁘려면 그렇게 슬퍼하라고 얘기하는 것은 오버스러운 주문이기는 하겠으나 슬픔의 수용과 표현에 대해서는 조금 더 담대해지시길. 그리고 애써 힘들어 가면서까지 쿨하게 보이려는 노력의 에너지는 아껴두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