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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기덕 Nov 22. 2021

오늘 뭐 마시지?

주절주절

친구를 만나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오늘 뭐 먹지?” 그러면 나는 술부터 정하자고 한다. 맥주를 마실지 소주를 마실지. 비가 오면 막걸리 얘기도 잊지 않는다. 친구가 소주를 마시자고 하면 담백한 음식을 추천한다. 회나 고기 같은 걸 말이다. 하지만 맥주를 마시자고 하면 안주 보다는 어떤 맥주를 마시고 싶은지 물어본다. 안주는 소주를 마실 때나 중요하지, 맥주를 마실 때는 중요하지 않다. 맥주를 마시자고 하면, 그날 기분에 따라 내가 정한다. 아른한 옛 추억에 잠기고 싶을 땐 IPA,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을 땐 파울라너, 부담없이 가볍게 마시고 싶을 땐 기네스를. 친구들은 맥주를 마실 땐 내 취향에 맞춰준다. 아마 오랜 여행 경험에서 나온 확신일거니 하고 존중해주는 것 같다.


맥주는 전 세계에서 맛볼 수 있다. 때문에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게 해외 맥주에 빠지곤 한다. IPA, 파울라너, 기네스 모두 여행을 다니며 빠진 맥주이다. 파울라너는 뮌헨에 있는 수도원에서 처음 마시게 됐다. 학센이라는 족발을 튀긴 음식과 함께 먹었다. 밀 맥주 특유의 깊은 향과 묵직한 바디감은 기름진 음식의 끝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주었다. 학센의 양이 워낙 많아서, 먹다보니 그 자리에서 네 잔을 비운 기억이 있다. 아쉽게도 한국에 돌아가서는 다신 느끼지 못할 맛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일에 학센이 있으면 한국에는 치킨이 있었다. 수도원이 아니여도 어디서든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라 더 자주 찾게 된다.


IPA를 마실 때면 꼭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어본다. 나는 자연스럽게 ‘India Pale Ale’의 약어라고 하며 구연 설명을 한다. 영국에서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 따뜻한 기후에도 상하지 않도록 홉을 많이 넣었다고, 그리고 홉 때문에 쓴 맛이 나고 도수가 높다고. 영국 맥주인데 인디아 명칭이 들어가는 게 아이러니한 맥주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럼 처음 듣는 친구들은 역시 해외물 들어서 다르다고 하지만, 한번씩 똑같은 얘기를 듣는 친구들은 또 시작이라며 웃어넘기고는 한다. IPA는 내가 여행 중 가장 오래 있었던 영국에서 즐겨 마시던 맥주라 추억이 깊다. 그래서 IPA만 마시면 말이 많아져 빈축을 사고는 한다.


기네스는 아일랜드에서 푹 빠졌다. 기네스 공장이 있는 더블린은 펍의 도시로 유명한데, 저녁이 되면 수많은 펍들에 불이 켜졌다. 처음 다니는 국외여행이라 무서우면서도, 펍이 유명하다기에 꾸역꾸역 숨죽이며 드나들었던 기억이 있다. 첫날엔 숙소 근처에 조용한 곳에서 혼자 마셨지만, 이후엔 간이 커져서 점심시간부터 도심 속 펍을 찾아가 마시곤 했다. 그러면 현지인들이 다가와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한국인이라면 갑자기 말이 많아진다. 자기 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니, 예전에 서울에 가봤다며 말이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온다. “얘 한국에서 왔대!” 하고 외친다. 그들과 같이 “코레아!”하고 건배를 하며 마셨다. 당시 영어가 안되서 의사소통도 잘 안되었는데, 한국인이란 이유로 즐겁게 마셨다. 이 일로 기네스의 가벼움에 매료되었다.


소주를 마실 때보다 맥주를 마실 때면 숙취가  심하다. 그래도 맥주를  모금씩 음미하는 시간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 친구들이 국산 맥주를 마시자고 하면, 무슨 그런 맥주를 마시냐며 핀잔을 준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추억이 담겨 있지 않아서이다. 하지만 국산 맥주도 나이가 들수록 깊게 자리매김할  같다. 젊었을  이렇게 소맥을 말아 마시지 않았느냐면서. 이번 주말에 친구를 만나면 먼저 얘기를 꺼내려고 한다. “오늘  마시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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