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영화 <그래비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2006년작 <칠드런 오브 맨>이다. 시가상으로 그래비티 보다 먼저 제작되었지만 우리나라에는 작년 즈음에 개봉한 것으로 알고 있다. 왜 이제야 개봉했는지 아쉽기도 하고 이제라도 볼 수 있으니 감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보고 나서 알폰소 쿠아론의 영화들은 꼭 빠짐없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멀다면 멀다고 할 수도, 또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2025년이다. 전 세계적으로 이유 모를 불임 사태에 빠져 인류의 종말을 맞이하고 있던 사람들은 당시 인류의 최연소 생존자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반면 이혼을 하고 회사에 출퇴근을 하며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인물 테오는 그런 국제적 비애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과 동시에 '인류의 마지막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방탕하게 살았던 멍청이의 죽음을 통쾌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영국에 들어오고자 하는 불법체류자와 난민에 대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저 기계적인 삶을 살아갈 뿐이었다. 아들의 죽음 이후 만난 적 없던 전 부인 '줄리아'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휴먼 프로젝트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테오가 할 일은 그저 난민에 속하는 한 소녀를 간 건너 데려다주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소녀가 임신을 한 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휴먼 프로젝트 멤버들의 배신과 전쟁통 속에 소녀를 지키고자 한다.
소녀의 이름인 '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인류를 구원할 아이를 잉태한 열쇠다. 비록 누군가의 자식인지 모르지만 키는 자신의 아이를 인류의 불임 사태를 막는 데에 공헌하기로 한다. 소녀의 이름이 '키', 열쇠인 이유는 열쇠는 누군가가 돌려야지만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가는 문으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열쇠를 여는 주체는 누굴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쉽게 테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한 인간인 테오를 넘어선 인류가 그 열쇠를 잡고 돌리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테오가 이러한 위험한 일에 아닌 다른 이유를 가진 계기는 키가 잉태한 생명이 테오가 잃었던 아들 '딜런'과 같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릴까 봐, 자신과 동떨어져있던 인류의 마지막을 마주하게 된 순간일 것이다.
당국은 이러한 전 세계적 불임 사태에 대해 두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하나는 불임의 가능성에 대해 헛된 희망을 걸어보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망연자실한 사태에 대해 다소 절망적이지만 현명한 것으로 비춰지는 '죽음'선택하기 이다. 정부측에서 국민들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권장한다니 정말 이례적이고 비윤리적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인류의 마지막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이 정부는 난민들, 사회적 약자에게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인류가 스스로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후대라는 공동체를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반면에 같은 생명을 가졌지만 자격이 없다고 보는 난민들에게는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인류를 구할 열쇠의 등장은 난민에서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 확고 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꼽는 장면은 전쟁통 속에서 자신이 살아있다고, 존재한다고 알려주는 생명의 울음이다. 생존과 생명에 대한 경외적인 반응이 사람들의 행동을 멈춰세웠고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 던지게 했다. 키의 아이가 인류를 마지막 절벽 끝에서 구제할 수 있는가에 대한 확신은 불투명하지만 그 생명의 존재 이유가 삶의 다른 원동력을 불어 넣었다.
2025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지금과 많이 달라진 것 없는 듯 연출하고 많은 sf 영화들이 화려한 미래와 발전된 세계를 그렸던 반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미래는 지금 바로 이 사회의 연장선이다. 따라서 다소 어둡고 빈부격차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난민들에게는 흔한 스마트폰 조차 허용되지 않는 모습을 그려나갔다. 아마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세계로 도약할 열쇠는 쥐어졌을 것이다. 이 열쇠를 있는 힘껏 붙잡고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나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고 이 원동력은 권력의 지배층 뿐만 아니라 피지배층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에서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