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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요원 Jul 16. 2020

나도 결국 <개인주의자 지영씨>

2017 KBS 미니 드라마 - 왓챠플레이

잘해줬는데 싫어해서 미안해요.

근데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 개인주의자 지영씨


혼자 지내는 건 편안한다.

식당에서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먹고,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영화를 홀로 보고, 깜깜한 집에 돌아와 조용히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아늑하면서 고요하다.


그렇지만 혼자인 건 슬프다.

외롭다기보단 마음이 아프다.

그런 잔잔한 아픔이 쌓여서 또다시 주변을 경계하는 가시를 만든다.


처음부터 지영씨 같은 사람이 존재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지영씨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개인주의자 성격이 어떤 아픔에서 비롯된 것처럼 단정 짓는 것은 고정관념이라고 말했다. 개인주의자 일지언정 언제나 이기주의자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자, 우리 여기서부터 솔직해지로 하자.

언제부터 우리는 개인주의자가 되려고 했을까.

왜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의 시시콜콜한 관계에서 벗어나 떳떳이 혼자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을까.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평생을 참고 살았던 것 같다. 온전한 기쁨도 슬픔도.

어린 시절에 막연히 티비에 나오는 불쌍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나라고 생각했었고 친구들과의 완만한 관계가 오해로 틀어지면 다시 고치는 법을 몰랐다.

그냥 나는 그렇게 내 학창 시절을 보내버렸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분명했으나 그걸 표현하는 순간 사람들의 반응을 감당하기 힘들어했다.

결국 나를 개인주의자로 만든 건 

내 어린 시절의 나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도, 친구와 싸워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사회적인 어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 법을 몰라 방치해둬서 결국 혼자서 살아가는 게 훨씬 편안하다고 느껴버린 어린애는 그런 어른으로 성장한다.

스스로 안타까운 건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도 결국 나이고 주변 사람들도 나를 그런 사람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언젠가 아빠에게 서울에서 같이 살고 있는 오빠 얘기를 하지 말라고 큰 소리를 내었더니 이해 못하겠다며 화를 내곤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 걱정은 안 하고 아들만 걱정하는 게 미웠던 게 아니었다. 딸인 내가 화를 내는 게 아빠에겐 이상한 일이었다. 그만큼 나는 참고 살아왔으니까.

그렇게 난 한번 개인주의자가 되었고 어쩌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라도 계속 개인주의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지영씨도 상처를 받아왔고 상처를 방패 삼아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물론 드라마 속 지영씨의 모습은 다소 과장되었고 이기적인 면이 훨씬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옆집 남자 벽수처럼 살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짜인 것 같다.

 

누군가는 개인주의자가 타인에 의해 치유받아야 하는 존재로 비치는 것에 대해 불편하다고 했지만 내가 생각한 지영씨는 누군가에 의해 구제받은 게 아니라 계속해서 구조 신호를 보내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외로운 삶을 끝내고 싶다고, 옆에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십 대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점은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꼭 해결하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야 깨달았다.


지영씨가 조금 더 사회적이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끼려면 벽수씨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상처를 다시 돌아봐야 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싸우는 모습과 아버지의 외도,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았던 지영씨는 부모와 절연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을 것이다.

근데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부모는 자꾸 연락하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늘 쉽지 않다. 나는 지영씨의 이런 모습이 결국 진정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는 와중에 한계에 부딪혔고, 벽수씨를 만났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해본 것이다.


벽수씨는 자신이 평생토록 사랑받기 위해 애썼던 것처럼, 이번엔 누군가에게 사랑을 나눠주기로 결심한다. 무슨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벽수는 상처를 받고도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은 어른으로 컸기 때문이다.

벽수씨의 마음도 지영씨의 마음도 너무 진실된 마음들이어서 누가 뭘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지영씨는 자신의 개인주의를 바꿔보려고 시도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개인주의가 정말 지영씨와 잘 들어맞을 수도 있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냥 나의 이런 모습을 받아들이면 모든 게 괜찮아질 수 있다.


애석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최근까지도 나 또한 그런 사람인 줄 알았고 나는 나의 이런 감정과 개인의 사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평생 이끌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언젠가 나의 상태를 본 지인의 '힘들지 않냐'는 질문이 내가 잘 가고 있던 길을 멈춰 세운 느낌이다.


진짜,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잘 모르겠다. 사람들과 막 만나고 싶다가도, 내 고민거리를 쏟아내고 싶다가도 

결국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고 싶다가도 이러다 어느 순간 날 정말 잃어버릴까 겁이 나기도 한다.


결국 나는 지영씨였다가 벽수씨였다가를 반복하는 삶을 당분간은 살 것 같다. 사람이 그립다가도 나 자체로도 벅차기도 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그렇다. 이게 편안하다. 

아직까진 이게 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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