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생각해보니 고등학생 때 난 참 재수가 없었다.
미용실을 자주 방문하진 않지만 매번 방문할 때마다 머리 해주는 분의 말주변에 항상 놀란다. 사소한 일상 이야기부터 추상적인 미래에 대한 고민까지. 공통점을 찾아내면 끊임없이 파고드는 집요함에 그들은 머리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말하는 걸 어디서 배울 수도 있겠다는 의심도 해봤다. 한편으로는 항상 이렇게 손님을 대해야 하는 직업적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만약 나 같이 소심하고 낯가리는 사람이 고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면 꽤나 골치 아플 것이다.
나는 그다지 사교적인 사람이 못돼서 낯선 이 가 말을 걸어오면 자기 방어모드에 들어간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도 궁금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언행이 나에게는 그냥 바람 같은 일뿐 내가 가는 길의 방향을 바꾸지는 않는다.
근데 가끔 이런 바람이 세게 불어올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간 미용실은 새로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곳이었고 나는 그들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충동적으로 머리를 하러 온 탓에 원하는 스타일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미용실 실장님의 개업 이야기, 손님 이야기까지 심심하지 않을 정도로 들었다. 여자 둘이어서 그랬던 건지, 나 빼고 아무도 없던 것 때문인지 모르지만 커플들의 '동거' 이야기가 나왔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같은 집에 사는 것은 예전처럼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쌍수들도 축하받는 일도 아니게 됐다.
나는 철없던, 그러니까 나 잘난 맛에 살았던 고등학생 때 연애도 한번 안 해봤으면서(물론 내 얘기다) 결혼하기 전에 동거를 꼭 해보고 결혼해보겠다는 친구에게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는 중학생 때부터 몇 번의 연애경험이 있고 그런 일들에 충분히 흥미를 가진 아이였고 나는 그냥 남자에 관심도 없고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게 더 좋았던 학생이었다. 그 친구를 딱히 미워했던 것도 아닌데 그 '동거'라는 단어가 고등학생의 머릿속에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고가 부러웠던 건지 아니면 정말 무모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친구도 그 당시 멋모르고 한 말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미용실 실장님의 주변에도 동거하는 커플들이 종종 있었고 그중 결혼을 한 친구들도 있다고 한다. 내 주변에도 정말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내게 더 이상 '동거'가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도 아니게 됐다. 하지만 과연 내가 동거를 할 수 있을까는 다른 문제다. 내가 거의 일평생을 모르고 살았던 가족처럼 살 수 있을까. 동거를 해봐야만 결혼할 수 있는 재목인지 알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다시 나를 고등학생 때의 나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결국 내가 학창 시절 그 친구에게 '동거'에 대해 그런 쓴소리를 했던 이유는 그게 옳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다고 그때 이미 생각해서였다. 근데 나는 그걸 숨기고 그 친구를 나무랐던 거고. 이럴 때 보면 나는 어렸을 때도 약간 재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 내가 친구와 멀어졌음에도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입시 시절에 그다지 크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재수가 없게 나만의 세상에 갇혀 살았었기 때문인 거 같다. 그니까 꼭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재수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나는 자기중심도 아니면서 내가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남에게 그 잣대를 들이밀 때가 있어서 재수가 없었던 거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제 그 재수 없음에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중이다. 하고 싶은 일에 고집이 있는 내가 좋다가도 대세를 따르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이 싫고, 남들은 웃는 이야기들에 웃지 못하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이 내가 만든 세상에서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재수 없게 살고 싶다가도 둥글게도 살고 싶다. 둘 다 일수는 없나. 아쉽다.
나도 미용실 실장님들처럼 살갑고도 싶을 때가 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덜 재수 없고 싶은 거겠지.
여담. 제목은 미용실에서인데 사진은 카메라수리점이다. 미용실에서 사진을 찍을 용기는 아직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