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그림자가 발치에 내려앉고서야
비로소 세상의 색채가 보인다.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우리는 얼굴을 놓쳤다.
길가의 이름 모를 풀꽃,
스쳐 지나간 눈빛,
내 안의 얼굴마저도.
뜨거운 태양은 식어
성숙한 노을이 되고,
치열했던 욕심은
파도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채우려 애썼던 세월은 가고
남은 것은 비워내는 평온.
사랑은 격정보다 깊은 이해였음을,
성공은 높이 오름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온도였음을,
주름진 손등의 흔적은
상처가 아니라
살아낸 삶의 훈장이었음을 깨닫는다.
황혼은 유채색이 무채색으로 바뀌는 시간,
그러나 그것은 색을 잃는 순간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색을 보는 순간.
어둠이 와야 별이 빛나듯,
무채색 속에서 삶의 의미가 선명해진다.
나는 이제 달리지 않고 걷는다.
얼굴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길 위에서 길을 묻는
아이러니한 인간으로 남으련다.
저무는 들녘 한 켠에 핀
한 송이 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