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된 마침표

by 안개꽃 눈송이


합격 문자를 확인한 순간, 가장 먼저 눈물이 터져 나온 건 기쁨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 4년, 내 이름 앞에 붙었던 '고시생'이라는 비루한 꼬리표를 떼어내 준 건 내가 아니라 연인, 민호였기 때문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밤샘 물류 센터 일을 전전하며 내 학원비와 책값을 대던 그의 거친 손등이 떠올랐다.

"민호야! 나 됐어, 드디어 끝났어!"

그는 말없이 나를 꽉 안아주었다. 그의 어깨에서 배어 나온 땀 냄새와 눅눅한 삶의 향기가 그날따라 유독 서글프게 느껴졌다. 나는 이제 그에게 빚진 모든 것을 갚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사한 저녁, 예쁜 옷, 그리고 우리가 미뤄두었던 모든 평범한 행복들.

하지만 첫 출근을 일주일 앞둔 저녁, 민호는 평소와 다른 차림으로 나를 불렀다. 늘 작업복 차림이던 그가 해묵은 셔츠의 깃을 정갈하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너무나 맑고, 또 깊어서 장난을 칠 틈조차 없었다.

"왜? 내가 취직해서? 이제 같이 행복해지면 되잖아. 나 월급 받으면..." "지수야, 너 만나는 동안 사실 나 많이 지쳤어. 네가 밤새 울며 전화할 때마다, 네 짜증을 다 받아내면서 나도 속으로는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었어."

민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비난이 아니라, 오래전 확정된 판결문을 낭독하는 판사처럼 냉정했다.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 굴뚝같았지. 근데 차마 못 하겠더라. 가뜩이나 힘든 사람 버리면 내 마음이 너무 괴로울 것 같아서, 그래서 네가 자리 잡을 때까지만 버텼어. 너 합격했다는 소식 듣고 나서야 비로소 나도 이제 살 수 있겠다 싶더라."


나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미안하다고, 내가 다 잘못했다고, 이제 내가 너를 뒷바라지하겠다고 매달렸다. 그동안 내가 빚진 거 다 갚게 해 달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민호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아니, 갚지 마. 너 직장 구했으니까 이제 번듯하게 네 삶 살아. 넌 충분히 더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미안해하지 마. 이건 내가 나 편해지려고 선택한 일이야...."


민호가 떠난 빈자리에는 마시다 만 식은 커피와, 내가 그에게 쏟아냈던 수만 가지의 감정 쓰레기들이 환상처럼 둥둥 떠다녔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민호를 연인이라 부르면서도 실제로는 그를 '감정의 쓰레기통' 정도로만 소비해 왔다. 시험 성적이 나오지 않는 날이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한 시간 넘게 소리를 질렀고, 공부가 안된다는 핑계로 그가 밤새 일하고 돌아온 아침에 신경질적인 문자를 퍼부었다. 그는 늘 "괜찮아, 지수야. 힘들어서 그래."라며 나를 다독였지만, 사실 그는 나라는 거대한 우울이 쏟아내는 오물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민호의 일상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가 물류 센터에서 상자를 나르다 다쳤을 때도, 나는 내 모의고사 점수가 5점 떨어진 것에만 몰두하며 울었다. 그는 내 합격을 위해 자신의 육체를 갈아 넣었고, 나는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의 영혼을 갉아먹었다.

그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쏟아내는 감정의 잔해들을 묵묵히 치워주고 있었던 '청소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다.


"미안해하지 마. 이건 내가 나 편해지려고 선택한 시기니까."


민호의 그 마지막 말은 배려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오물이 가득 찬 통을 비우고 싶지 않다는, 한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거부였다. 그는 내가 합격하자마자 이별을 고함으로써, 내가 가진 유일한 권력이었던 '약함'을 빼앗아 버렸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도, 미안하다며 매달릴 수도 없게 되었다.


내가 번듯한 직장을 얻고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다고 믿었던 순간, 나는 내가 얼마나 비겁하고 이기적인 방식으로 연애라는 이름을 빌려 그를 착취해 왔는지 깨달았다.

모바일로 받은 합격 통지서가 무색해졌다. 4년의 고군분투 끝에 내가 얻은 것은 '성공'이 아니라, 나를 진심으로 아꼈던 한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소진시켰다는 참혹한 증명서였다.


그가 떠난 빈자리를 보며 깨달았다. 지난 4년, 내가 합격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동안 그는 나와의 이별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홀로 싸우고 있었음을. 그는 내가 가장 약할 때 곁을 지켰고, 내가 가장 강해진 순간에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었다.

그것은 이별마저도 내게 주는 "마지막 지원'이었다. 지독하게도 다정하고, 잔인할 만큼 완벽한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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