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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방 Oct 14. 2023

만난 적 없는

G

(이이영 씀)


버스에 한 중년 부부가 탔다. 둘은 내 앞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핸드폰을 봤고 여자는 창가에 붙은 버스 노선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했다. 이거 종로 안 가는 것 같아. 남자는 쓰읍, 소리를 한 번 내더니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여자는 울상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 안 간다니까. 아, 이 사람아 내가 다 알아 가만히 앉아있어. 여자는 이거 안 가는데, 이 말만 중얼거렸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버스 종로 안 가요, 그렇게 말해줘야 하나. 남자는 어디쯤 도착해야 종로에 안 간다는 걸 알게 될까. 


결국 남자가 시끄럽고 했다. 나는 익숙한 긴장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여자가 한 번만 더 말하면 남자는 폭발할 것 같았다. 익숙한 생각을 했다. 여자가 가만히 있어야 될 것 같은데. 나는 여자를 조용히 시키는 데 능숙했다. C가 G에게 화를 낼 때. 그때 나는 G가 화를 내는 것보다 C가 화를 내는 것이 더 싫었다. 그만해, 참아, 제발 좀. G는 절대 참는 법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C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C가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해도, 이 싸움이 빨리 끝날 수만 있다면 그러길 바랐다. 그게 어린 내가 유일하게 바라던 일이었으므로. 


C와 G가 싸우는 와중에 나는 낭만적 이게도 쪽지를 썼다. 종이 한 귀퉁이를 쭉 찢어서 연필로 꾹꾹 눌러썼다. 화내지 마. 내가 그걸 C에게 내미는데, C는 내 손을 뿌리쳤고, G는 내게 화를 냈다. 가만히 있으라고. 그 뒤로 내 기억은 늘 암전이다. 그 쪽지는 어떻게 했는지 몇 시에 잤는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지. 그 감각 하나만 꼭 붙들었던 것 같다.


맞는 소리가 들렸다. 이영아, 이영아. C가 나를 불렀다. 그럼 나는 쪽지처럼 등장해서 그 둘 앞에 섰다. 그만해.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만하라는 것처럼 C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느닷없이 G는 C에게 너는 이영 때문에 살았다고 말한다. 아니었으면 다 부숴버렸을 거라고. 내가 C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다. 내가 없었다면, 세간살이는 다 부서지고 C도 부서졌을 거라는 말을, 새겨 들었다. 


G 이야기도 시작해 볼까. 여기서 그만두면 너무 단순한 악인이 되니까. 더 복잡한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G의 대사를 골랐다. 이게 사는 거냐. 정말 외롭다. 아무도 모른다. 근데 잠깐. 너무 많은 말을 하게 해주는 걸까. 내가 C의 입을 다물게 한 시간에 비해서. G는 항상 말했으니 오늘은 단순한 악인이 되는 것을 선택하겠다. 


여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버스는 가야 할 길을 갔다. 


C는 자기 몸에 어떤 말들이 쌓이는지 몰랐다. 무식하다는 말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어떻게 체화되어 화학작용을 일으키는지 몰랐다. 그 반복되는 말이 어떤 모양의 흔적이 되는지 상상해 본 적 없는 C는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고 화가 나고 답답해서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뒤돌아서면 그 결론마저 잊어버린 채 밥을 하고 설거지를 했다. 


알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C에게 그만하라고 하는 말을 멈추고 나에게 말해야 한다. C에게 그만하라는 말을 그만해. C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만해. C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을 그만해. 결국엔 C가 어처구니없다고, 당신은 뭐가 잘났냐고, 아주 꼴사납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게 만들어야 했다. 이게 사는 거냐고, 아무도 모른다고, 정말 외롭다고 울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자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이 이어졌다. C는 조금도 양보하고 싶지 않는 사람처럼 한껏 비꼬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결론은 늘 G에게 압도되어 입을 다무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내가 입을 다물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이번엔 막막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C는 G에게 내가 말을 하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너 뭐 벙어리 되려고 그러냐? G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내 마음은 언제나 이 사람들을 비껴가는구나 생각했다. 


C는 내가 어떤 흔적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알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 버스는 종로에 가지 않는다고. 옆에 앉은 초조한 여자를 위해서. 갑자기 둘이 마주 보고 웃었다. 무엇이 해결된 걸까. 내가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는데. 그 순간을 언제 놓친 걸까. 종로가 아닌 곳에서 그 둘은 손을 붙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여자는 한 번도 초조한 적 없던 것처럼 홀연하게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다음 날이면 C와 G도 아무렇지 않게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내가 지켜줘야 하는 C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다. 새벽 내내 몸과 마음을 단련해, 우스꽝스러울 만큼 비장해진 내가 그들 곁에 가 앉는다. 종로에 가지 않는다고 말할걸. 싸워서 무섭다고 말할걸. 싸울까 봐 불안하다고 말할걸. 말할걸. 말할걸. 나는 모든 것이 떠난 뒤에야 깨닫는다. 너무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걸. 멸치를 먹을 때가 아닌데 멸치를 집어 먹었더니 엉뚱한 곳이 튼튼해져, 앞으로도 이런 날들을 얼마간 더 버틸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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