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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물 씀)
7월에 처음 미술관에 일하러 와서 내 사물함을 배정받았을 때, 이름표가 붙어져 있었다. 이지윤. 일하다가 그만뒀거나 계약이 종료됐을 사람. 유니폼에 있는 상표에도, 무전기에서도 이름을 계속 발견했다. 은혜, 리윤, 하나… 지금 이곳에 없는 여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9월 28일에 마지막 출근했다. 내가 없는데 이름표가 붙어져 있는 건 싫어서 사물함에, 무전기에 붙여 놓은 이름표를 다 뗐다. 세탁 후에 유니폼을 찾아야 해서 내 이름을 써놓은 셔츠의 상표는 어쩔 수 없다. 시간이 더 지나면 상표에 써놓은 내 이름은 번지고 번져서 자연스럽게 알아볼 수 없게 되겠지. 그 번진 자국이, 이 유니폼을 다시 받게 되는 사람에게는 세탁 후에 옷을 찾을 단서가 될 것이다. 그 위에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새로운 표시를 할 수도 있다.
김은비95. 동명이인이 있어서 구분하려고 미술관에서 멋대로 붙인 태어난 연도. 처음엔 사람들이 은비라고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를 은오(은비95를 줄인 별명)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와 동명이인인 사람은 은구(은비99를 줄인 별명)라고 불렸다. 처음에 근무표에 김은비95라고 적힌 걸 봤을 땐, 멋대로 나이가 알려지는 게 싫었는데 은오는 좀 귀여웠다.
퇴사할 때 내 이름표를 다 떼버리면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가장 큰 흔적이 사라진다. 물론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어버리겠지. 12월이 되면 계약 연장을 제안 받은 사람들 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이전에 퇴사하거나 계약 종료로 떠날 것이다.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이 공간에서 사라지겠지만 이름은 남을 거다. 그 후에 열리는 전시에서 일하기 위해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면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쓸 것이다. 남겨진 이름과 새롭게 쓰일 이름. 떠나는 사람들과 새로운 사람. 이토록 쉬운 대체. 그걸 생각하면 여름이 지나고 서늘해진 바람을 맞을 때처럼, 기분이 이상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그만두려고 했다. 10월 휴무표에 가로로 그어놓은 내 이름을 봤을 때, 근무 중에 팀장이 있는 사무실로 오라는 무전을 들었을 때 그건 불가능하겠다고 생각했다. 팀장실에서 퇴직서를 쓰고 왔을 때, 팀장실엔 왜 갔냐고 H는 내게 물었다. 어차피 들킬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아서 그만둔다고 했다. H는 예상하지 못한 듯 눈이 커졌다. 근무가 끝나기 30분 전, H와 잠시 이야기했다. H님은 계약기간까지 하세요? H도 10월까지만 하고 그만둘 거라고 했다. 새로운 꿈이 생겨서 그걸 위해 다른 일을 할 거라고 했다. 나는 좋네요, 잘될 거예요. 라고 말했다. 그 말은 정말 진심이었다.
퇴근 카드를 찍을 때 H는 뒤에서 내 어깨를 감싸서 안으며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 포옹을 받으면 몸이 얼어버리는 나는, 내 어깨를 끌어안은 H의 팔을 쓸어주었다. 내가 이곳을 그만두는 걸 조금이라도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H에게 그만둔다고 말하기 전까진 하지 않았던 생각이었다.
미술관은 일하는 내내 나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허리나 목이 아프거나, 청각 장애가 있거나, 서있을 수 없거나 다리가 안 좋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8시간 동안 서있어야 하고 무전기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때문에 최저시급을 주고 싼값에 젊은 여성을 고용하는 걸 테다. 전시장으로 가는 동선과 디지털 가이드를 다루는 방법을 설명할 수 있고, 작품을 만지지 말라고 경고할 수 있으면 된다. 쉽게 대체될 수 있다는 두려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돈을 버는 것 말고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라는 생각이 이 일을 그만두는 이유 중 하나다. 바른 자세로 있어라, 폰을 만지지 말아라, 관람객에게 적극적으로 친절해라. 노동자를 감시하는 분위기도 그만두는 데 한몫했다.
퇴직서를 쓸 때 팀장은 내게 물었다. 많이 힘들었나요? 아무런 대답도 하기 싫어서 웃어 보였다. 어떤 점이 힘들었냐고 집요하게 물어서 억지로 답했다. 그냥 조금 힘들었어요. 그만두면 전에 했던 출판일을 다시 할 예정이신가요? 잘 모르겠다고 나는 답했다. 팀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무슨 일을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은 아니다? 마스크를 써서 입이 보이지 않는 얼굴 위로 웃음이 번졌다. 이번에도 나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다시, 처음 했던 질문으로 돌아와서. 지금 이곳에 없는 여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른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못 하고 있거나 안 하거나 오래도록 꿈꾸는 일을 하거나. 당연하게도 모두가 가진 상황과 환경은 다르니까. 나는 다음에 어떤 일을 하지? 불안해서, 답답해서, 혹은 새로운 일을 찾아서 이곳을 떠났던 수많은 여자들이 지금도 이 질문을 하고만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