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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방 Oct 14. 2023

네 개의 집

I

(은물 씀)


베를린에 있는 한 달 동안, 일주일씩 숙소를 바꿔가며 지내고 있다. 첫 번째로 잤던 곳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 예약한 호스텔이었다. 여성 전용 3인 도미토리실에 묵었는데, 운 좋게 혼자 침대를 썼고 3명이 꽉 차는 날도 드물었다. 같은 방을 썼던 창은 영국에서 공부하다가 베를린으로 여행 온 대만 사람이었다.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했다. 어쩌다 여행을 오게 됐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오늘은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 나눴다. 창을 만나기 전까진 카페나 식당에서 주문을 하거나 길을 물어볼 때 말고는 누구와 말할 일이 없었다. 창과 대화를 하다가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다는 말을 툭했다. 나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창은 조용히 듣다가 내일 같이 아침을 먹지 않겠냐고 물었다. 창이 찾은 카페에서 아침을 함께 먹고 창은 그날 오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베를린에서 누군가와 첫 번째로 헤어지는 거였다. 


두 번째 숙소는 노이쾰른에 있었다. 스카치니와 로기라는 검은 고양이 두 명과 호스트 I와 함께 지냈다. 유럽에 있는 집들은 대부분 열쇠를 썼다. I의 집 현관문은 아주 빡빡해서 열 때마다 요령이 필요했다. 문을 못 여는 나를 보고 I는 옆에서 붙어 서서 문 여는 법을 강습해 줬다. 열쇠를 오른쪽으로 더 이상 안 돌려질 때까지 돌리고 밀었다가 당겨. 푸시 앤 풀이라고 말했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웃으며 답했다.

“I’ll practice(연습할게)”

화장실이 급한 날에는 문을 열다가 싸는 줄 알았다. 그 집에 산 지 3일이 지난 후에 문을 여는 데 겨우 익숙해졌다.


I는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뮤지션, 스트립 댄서, 사우나 마사지사, 에어비앤비 호스트… 그는 집에 있을 때도 락앤롤의 기운이 느껴지는 빈티지 티셔츠에 와이드 가죽 팬츠를 입고 있었다. 밤새 클럽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고 온 다음날 밤에도 파티에 놀러 갔다. 나랑 바나나 주스를 나눠 마시다가 갑자기 결연한 표정으로 파티에 가기 전에 집을 청소할 계획이라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내게 양해를 구하고 노래를 크게 틀었다. 화장실 바닥을 닦고 변기에 락스를 콸콸 붓고, 설거지를 하고 거실 바닥을 쓸고 닦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할 수 있다면 I의 에너지를 훔쳐 오고 싶었다. 


고양이 로기는 내 방에 있는 침대를 좋아했다. 내가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면 나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 곁에 오래 있었다. 로기가 방 밖으로 나오고 싶을 때 나올 수 있도록 나는 늘 방문을 활짝 열어두고 집을 나섰다. 하얀 시트가 깔린 내 침대에는 로기의 검은 털이 군데군데 묻었다. 온통 검은색에 연둣빛 눈동자를 가진 로기에게 숙소를 떠나기 전날 고맙다고 말했다. 네가 베푼 다정 덕분에 이 집에서 더 행복했다고. 내가 가지고 있는 운을 너에게 나눠 줄 테니까 사는 동안 건강하게, 스카치니랑 I랑 행복하라고. 동물들에겐 내가 가진 행복과 운을 준다고 말해도 오히려 충만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집을 떠나는 날, I는 베를린과 관련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든든한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세 번째 숙소는 템펠호프 공원 근처에 있는 곳이었다. 가족이 살고 있는 큰 집의 방 하나를 빌리는 거였다. 이 집의 유일한 단점은 6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외엔 모든 게 완벽했다. 수많은 식물이 있는 테라스와 각각 다른 무늬의 타일로 조화롭게 꾸민 부엌에서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아주 푹신한 소파가 있는 거실이 있다. 내 방에 누워있으면 창문으로 하늘이 보였다. 나무로 된 바닥이라 걸을 때마다, 침대에서 누웠다 일어날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소음이 좋았다. 이 집에 살 때쯤, 베를린에 있다는 이유로 애써 어디를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받아들이게 됐다. 아침엔 부엌에서 요리하고 차 마시는 소리를 듣다가 음악을 들었다. 아침에 음악을 들으면 이상하게 기분이 울렁거렸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할 때 창밖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뭐야, 무슨 주거 환경이 이렇게 좋아. 창문을 열면 건너편 건물의 벽이 보이는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생각났다. 이것들을 매일 누린다고? 좋은 동시에 재수 없었다. 


에어비앤비에서 했던 모든 요리는 다 망했다. 맛을 내는 데 필요한 재료가 여기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간장, 참기름, 연두, 올리고당이 음식의 맛을 얼마나 좌우했는지 깨달았다. 내가 한국에서 가져온 것은 라면 몇 개와 고추장뿐이었다. 맛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맛있게 만들려고 고추장을 추가하면 그냥 고추장을 넣은 맛없는 음식이 됐다. 그러다 보니 요리에 흥미를 점점 잃었다. 사 먹는 것도 지겨웠고 디저트가 아니면 딱히 욕심나지 않았다. 그래서 점심은 사 먹고 저녁은 요거트에 과일을 추가해서 먹거나 마트에서 간편식품을 사 먹었다. 베를린은 마트 어디에 가도 비건 제품이 많았다. 여기야말로 ‘비건 하기’가 아니라 ‘비건으로 살기’가 가능한 곳이었다. 한국에서보다 덜 잘 챙겨 먹는데도 낯빛은 더 좋아졌다. 종종 잘 지내냐고 연락하는 친구들에게 답했다. 잘 지내. 이곳에서 있는 게 너무 마음이 편해. 안전하다고 느껴. 이 느낌이 무엇으로부터 오는지는 잘 모르겠어. 우선 서로 관심이 없는 게 큰데, 그 이상의 것들이 여기에 있어. 


숙소 근처엔 작은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다. 호수엔 늘 오리와 새가 있었다. 산책하다가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 돌아봤더니 내가 생각했던 그 오리였다. 온통 검은색인데 부리만 하얀 오리. 꼭 변장을 한 것 같았다. 여기서도 알아볼 수 있는 게 생겼네. 오락가락하는 날씨 때문에 감기에 걸리긴 했지만 이제는 그런 날씨도 익숙해졌다. 조금 비 맞는 것쯤이야 그러려니 하게 됐다. 더 이상 어디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구글맵에서 이상하게 알려줘도 주변을 꼼꼼히 돌아보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길을 묻지 않고 직접 찾는 방법이 더 마음에 들었다. 길에서 가끔 누군가 조롱을 담아 독일어로 Hallo(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도 주눅이 드는 것이 아니라 욕부터 나왔다. 겁을 조금씩 상실하고 있었다. 


틴더로 데이트도 했다. 눈이 하루 종일 오는 날이었다. 스몰토크 없이 바로 밤에 맥주를 마시자고 말하는 게 마음에 들어서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다행히 실물이 더 나았다. 바에 가려나 했는데 슈페티(Späti)*에서 맥주를 사서 돌아다니면서 마셨다. 눈 오는 걸 보는 게 좋았다. 돌아다니다가 괜찮아 보이는 바가 보이면 들어가서 맥주를 마시고 화장실에 갔다. 얘보단 다음에 만난 애가 더 마음에 들었다. 웃는 게 귀여웠고 나랑 비슷하게 영어를 잘 못하는 것도 마음이 편했다. 맥주를 마시다가 바 안에서 당구를 치고 드라이브를 했다. 지하철 우반을 타고는 멀어서 못 갔던 곳들을 차로 휙휙 지나쳤다. 


그 후엔 네 번째 집으로 갔다. 그게 베를린에서 정한 마지막 계획이었다.



*심야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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