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은물 씀)
나는 미술관 서비스직 노동자다. 정해진 작품 옆에 서서 관람객이 작품을 못 만지게 하고, 전시를 원활하게 볼 수 있도록 질문에 답하고, 전시장 동선을 안내하는 일을 한다. 출근하면 그 날 일할 시간표가 나온다. 2주 간 나의 번호는 37번이다. 시간표는 9시 30분부터 1시간 혹은 30분 단위로 쪼개져 있다. 9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표를 검사하는 수표 근무, 10시부터 30분부터 12시까지 작품 화분 옆. 시간마다 서 있는 곳을 ‘포지션’이라고 부른다. 매일 포지션은 4~5개 정도다.
첫 출근한 날, 나의 첫 포지션은 종이로 만든 커텐 옆이었다. 불투명한 하얀색 벽과 매끈한 회색 바닥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하얀 커텐이 공중에 팽팽하게 펼쳐져 있었다. 관람객이 작품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매뉴얼대로 인포메이션에 문의해달라고 해야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제멋대로 답했다. 이 종이커텐은 잘라서 이어붙인 건가요? 한번에 오려내서 펼친 것 같아요. 내 대답을 듣고 탐탁해하지 않는 사람도, 다시 한번 더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도 있었다.
8시간을 서있다 보면 무릎, 허벅지와 종아리가 팽팽하게 수축된다. 누군가 내 다리 근육을 잡아당기고 있지만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다. 저리고 아프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상상을 한다. 바닥이 푹신한 전시장에서는 누워서 자고 싶다.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우습다. 폰도 볼 수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지나가는 관람객을 보거나, 작품에 다가서는 관람객을 감시하거나, 작품을 보는 일 뿐이다. 한 자리에만 서있는 걸 견딜 수 없어서 나는 작품 주위를 빙글 빙글 돈다. 출근하면 매일 만 보가 채워졌다.
전시장에는 전시를 보면서 들을 수 있는 헤드셋이 비치되어 있었다. 헤드셋은 오후가 되면 자주 방전이 됐다. 직원들은 그럴 때마다 무전으로 알렸다.
“헤드셋이 방전돼서 충전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방전이라는 말이 좋았다. 나는 미술관에서 일하면서 매일 방전되고 있었다.
“37번 김은비 방전돼서 충전하겠습니다.”라고 무전을 치고 내게 정해진 위치를 벗어나 멀리 달아나는 상상을 했다. 상사들에게 매일 바른 자세로 있으라고, 폰 보지 말라고 눈치를 주는 무전이 오는 그곳에서 그럴 수 있다면 신날 것 같았다.
업무 포지션 중에 지원 근무자가 있다. 화장실이 가고 싶다거나, 급한 일을 점심시간에 처리하지 못한 다양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지원을 부르면, 지원 근무자가 가서 대신 서 있는다. 내가 지원을 부르는 이유는 두 가지다. 화장실이 가고 싶거나, 서 있고 싶지 않거나. 매 시간 지원을 불러서 화장실에 13분을 있다가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13분이라도 변기 위에 앉아 있다가 돌아오면 어쨌든 시간이 조금이라도 흘렀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지원을 불렀다. 한 날은 같이 일하는 직원 F가 급한 일이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앞으론 10분 안에 돌아와 달라고 말했다. 가끔 말고는 매일 지원을 당장 불러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도 지원은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닿기 마련이다. 내가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고 피해를 준다는 식으로 말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렇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나만큼 이곳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절실한 사람이 있다면, 정말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보다 먼저 지원을 불렀을 것이다. 그러지 못한 것까지 내가 신경 쓸 수 없다. 헤아리고 싶지도 않다.
새로 열린 전시장의 어떤 포지션에는 관람객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다. 전시장에 손님이 없어서 그곳에 잠시 앉았다. 나와 먼발치에 떨어져 있던 F가 내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디 아파요? 아니요. 그럼 안돼, 안돼. 일어나세요. 차라리 힘들면 지원을 불러서 쉬어요. 내가 앉은 게 이번엔 그에게, 이 미술관에 어떤 피해를 준 걸까? 왜 내가 스스로 쉬는 시간을 조금씩 만드는 걸 막을까? 나는 그때 단지 2분을 앉아 있었을 뿐이다.
나는 누군가가 몰래 앉아 있으면 대신 망을 봐주는 사람이다. 어쩌다 지원 근무를 하면 화장실을 가는 뒷모습에 비록 화장실이지만 쉬고 싶은 만큼 쉬고 오라는 말을 불어넣는다. 세상이 나 같지가 않아서 텁텁하고 습한 늦여름의 공기를 매일 들이마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끔은 숨 막힌다. 똥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향수 냄새, 땀 냄새가 나는 화장실에서 쉬는 일조차 눈치를 봐야하는 곳. 교대가 일찍 돼서 점심시간에 1분이라도 빨리 가면, 다시 본인 포지션으로 돌아가라는 무전이 들리는 곳에서 50일을 보냈다. 여름에서 가을이 되었는데 들이마시고 내뱉는 숨은 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