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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방 Oct 14. 2023

언어가 된 몸짓

E


(이이영 씀)


일주일에 한 번 달리기 수업을 들으러 한강에 간 적이 있다. 초보 러너를 위한 수업이라고 해서 갔는데 초보 러너는 나 하나뿐이었다. 맨 뒤에서 달렸다. 격차도 심했다. 코치가 속도를 최대한 늦춰 나랑 같이 뛰었다. 숨 쉬세요. 흡 후후, 흡 후후. 나는 과장된 호흡을 해 보였고, 만족한 코치는 이제 가볍게 뛰어보라고 했다. 가볍게요? 무릎을 앞으로 던지듯 뛰어보세요. 무릎을요? 상체에 힘을 빼고 뛰어보세요. 잘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잘하고 있는 게 없는데 어정쩡한 격려를 받았다. 코치는 앞 대열을 재정비하러 쏜살같이 멀어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두 번 다신 가지 말아야지 다짐한 거 치고는 세 번이나 더 갔다. 갈 때마다 내가 제일 맨 뒤였고, 코치 흥미 밖의 사람인 건 여전했지만 그래서 세 번 더 갔다. 그즈음 나는 매일같이 수치심을 단련했다. 난생처음 시를 써보겠다고 찾아간 수업에서도 그랬다. E는 내가 쓴 시를 읽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뭘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는 시네요. 다음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마음으로 써봐요. 


편지를 쓴다는 마음이요?


막막한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시는 부동의 영토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시대에 따라서 유동하고 있지요. 두려운 마음은 가질 필요 없어요. 유동하는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요. 이리저리 유연하게 흘러가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빈손에서 석석 소리가 나. 생각보다 쉽게 잘려서 힘을 주게 되는 거야. 무딘 가위를 쓸 때는 손잡이랑 가까운 곳. 안쪽 면을 써야 돼. 가장 날카로운 부분은 의외의 곳에서 나타나니까. 


E는 뿔테 안경을 고쳐 쓰고는 말했다. 편지를 써오라고 했는데 엽서를 써왔네요? 


세 번째 시 수업은 시만 제출하고 결석했다. 달리기 수업은 빠지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두 명 더 들어왔다. 평소 자전거를 즐겨 탄다고 했다. 나는 내 몸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언어들이 이 사람들 눈에 충분히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 지면을 딛고 달려 나갈 때 흔들리는 가슴과 유독 많이 흐르는 땀 그런 것. 한강에서 뛰면 아무리 멀리 가도 제자리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나는 위아래로 진동했다. 우리는 네 번 실패할 거예요. 첫 수업 때 E가 한 말이었다. 쓴 사람은 없고 시만 도착한 그날, E는 내게 무슨 말을 해주려고 했을까?


달리는 것보단 이온음료를 마실 때가 더 좋았다. 음료는 딱 두 번. 쉬는 시간에 한 번, 수업이 끝나고 줬다. 종이컵을 들고 동그랗게 모이면 코치가 수강생 컵에 음료수를 나눠줬다. 더 많이. 더 많이. 코치는 항상 반쯤 따라줬고 그건 갈증을 해소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도대체 어떻게 써야 되냐고. 시원한 바람이 뜨거워진 두피를 식혔다. 갑자기 나는 서서히 작아지고, 한강 다리는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풀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일 년 전, 오후 3시면 일어나는 일이 있었다.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는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 느낌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3시였다. 이 시간을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러면 책상에 놓인 커터 칼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 위에 앉아 상처 내는 일에 몰두했다. 


맨살이 변기에 닿으면 손에 하얀 가루가 묻었다 

고운 것이 공기 위로 피어올랐다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맨살뿐이라

눈을 감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살갗을 찢을 때 머리끝으로 타고 올라가는 진동은

다시 고스란히 손끝으로 

가장 부드러운 곳으로 떨어졌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안경을 고쳐 쓰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방울방울 맺힌 피를 매달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올 땐, 나는 다른 사람이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고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어른 비슷한 것이 됐다. 아릿한 피부를 느끼며 생각했다. 이건 내가 아프다는 증거야. 유일하게 가시화되는 나의 고통. 그래서 애틋했고, 그 순간을 오랫동안 끊어내지 못했다. 


타일마다 희미한 손자국을 남기며  

흔적이 된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걸어가면 

시간은 세시였다


눈을 뜨니 E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나는 오버페이스로 달리는 사람처럼 젖어갔다. 숨 쉬세요. 흡 후후, 흡 후후. E가 입을 움직였다. 그는 나의 발신에 응답하는 중이었다. 전해질이 풍부한 말들이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물었다. 이렇게요? 잘하고 있어요.


딱 한번 내 몸에 새겨진 흔적이 시가 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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