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모 재벌 그룹의 전산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본사의 미국인 컨설턴트 2명을 한국에 초대했다. 다국적 기업이라 하더라도 각 나라에 필요한 모든 특급 엔지니어를 보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특급 전문가가 필요한 경우, 미국 본사가 인력풀이 가장 크기 때문에, 프로젝트 규모와 고객의 중요도에 따라 본사의 전문 인력들이 각 나라에 파견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난 고객 미팅을 무사히 마치고, 먼 곳에서 온 이방인들을 위해 저녁 투어에 나섰다. 투어라고 별건 아니다. 그저, 괜찮은 한국식당에서 불고기나 비빔밥 등 외국인들이 무난하게 좋아할 만한 음식을 먹고, 가까운 명소 한두 군데를 방문하고 사진을 찍고, 맥주 한 잔 하고 호텔에 데려다주는 게 외국인 동료를 위한 투어다.
기술 용어를 오후 내내 개떡같이 통역한 원죄가 있었던 나는 그 원죄를 씻고자 고객사 근처의 조금 비싼 한정식 집으로 이들을 데리고 갔다. 찰떡같이 이해해 준 보답으로. 그런데, 청포묵부터 연포탕, 그리고, 처갓집에서나 먹을 수 있던 갈비찜까지... 좌우지간 뭔가가 계속 우리가 자리 잡은 테이블에 깔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잡채와 불고기만 손댄 외국인 친구들을 데리고, 2차로 근처 영어 이름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세계를 돌아다니는 이 친구들과 자연히 각 나라 고객들의 영어가 화제에 올랐다.
"Alan, aren't we better at English than the Japanese? (한국인이 그래도 일본인들보다 영어 잘하지 않아?)"라고 물었더니, Alan이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No. Japan is better. You know why? I will show you. (아니. 일본이 나아. 왜 그런지 알아? 내가 보여줄게.)"
Alan은 손을 들어 호프집 직원을 부르고, 곧이어 우리 테이블로 20대로 보이는 여직원이 왔다. Alan은 그 직원에게 "Can we have two more beers and the same food, please? (맥주 2병 더 주시고, 같은 음식도 하나 추가 부탁해요.)"라고 그 유창한(?) 영어로 추가 주문을 했다. 나를 보고 그 푸른 눈을 찡긋하며.
그 여직원은 멀뚱멀뚱 나와 미국인 동료들을 번갈아 보다가, 아무 말 없이 그냥 돌아갔다. '뭐야. 어쩌라고. 갖다 준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Alan은 "This is why. In Japan, they at least try to respond in English, but Koreans are very shy. Seems that Koreans do not want to speak in English if not perfect. Koreans are very afraid of making a mistake. Even during the meeting with clients today, it was the same. Nobody asked any questions, even though there must have been some" (이게 이유야. 일본에서는 적어도 영어로 답하려고 노력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매우 수줍어해. 한국인들은 완벽하지 않으면 영어로 말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 실수하는 걸 엄청 두려워하는 것 같아. 오늘 고객들도 그랬잖아. 아무도 질문 안 해. 분명히 질문이 있었을 텐데.)
'그건 그래. 너네들이 한국인 컨설턴트였다면 질문이 쏟아졌을 거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호프집 젊은 직원이 영어를 전혀 못하는 건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부끄러워서, 아니면 틀리면 창피할까 봐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바로 옆에 누가 봐도 한국인으로 보이는 나도 있었으니, 더 말하기 싫었을 수도 있다. 영어가 한국인에게 어려운 건 읽기, 쓰기에 집중된 교육 방법상의 문제도 있지만, 문법적인 차이도 있지만, 가장 큰 장애는 Alan이 지적한 대로 수줍음이었다.
난 Alan에게 말했다. "Well, I guess you’re just not her style. That’s probably why she left without saying anything. Maybe your style is more Japanese." (글쎄, 네가 그냥 그녀의 스타일이 아닌 거 같아. 그래서 아무 말 없이 그냥 가버린 거겠지. 너는 일본 스타일인가 보다.)
썰렁한 내 농담에 Alan은 말했다. "Is that so? Then I'll just go to Japan next time." (그런가? 그럼 다음엔 일본에 가야겠다.)
"Yeah, you're definitely not the Gangnam Style of Korea." (응, 너는 확실히 강남스타일은 아니야.)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유행할 때였다.
시답잖은 농담과 함께 테이블 위에는 맥주병이 쌓여갔다. 내일은 또 다른 고객사를 만나야 하는데, 내일도 기술 통역을 할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벌써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휴. 그놈의 영어 앞에만 서면 한국인은 왜 이렇게 작아지는지.내 아이는 영어 때문에 고생하지 않게 해 줘야지.
그 여직원은 우리가 떠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Alan이 예상한 대로. 쩝.
* 개떡같은 통역을 찰떡같이 이해해준 알란이 다시 보고 싶어진, 나이 많은 아빠의 육아와 교육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아이 키우는데 반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