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0. 중국 직원이 보여준 찐 영어

내 아이를 위한 영어 교육 첫걸음

by 사랑 머금은 햇살

"어휴, 또 해외 출장이라니." //E09. 영어 앞에 서면 왜 우린 작아지는가. (2탄)입니다.


미국 출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싱가포르였다. 시차 적응도 아직 안 됐는데 말이다. 유럽, 아시아, 그리고, 본사에서 온 수백 명의 직원들이 거대한 호텔 컨벤션 홀에 모였고, 본사 임원들이 각 나라별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지금 그들의 정확한 발표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키가 190cm가 넘는 거구의 아시아 담당 임원이 국가별 투자 계획 설명을 마치고, 혹시 질문이 있는지를 청중에게 물었다. 영어로 질문해야 하는 자리라서, 우리 한국팀은 튀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답게 "얌전히" 있는데, 저 강단 쪽에 있던 중국팀의 한 직원이 손을 들었다. 그가 앉은자리로 미루어볼 때 대리나 과장쯤 되지 않나 싶었다. 미국인 임원은 마이크를 중국팀에 가져다주라고 했고, 행사 스탭이 마이크를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발표 자료가 차지하던 화면에 비친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중국인이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그 직원은 일어서서 질문을 시작했다. 당연히 영어로.


"KOREA SMALL... CHINA BIG... WHY KOREA INVESTMENT BIG FROM CHINA?"


Oh My God. 문법은 엉망이고, 발음은 중국인스러운(?) 영어였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동료들도 99%는 알아들었다는데 500원을 건다.


한국인들이 만일 질문을 해야 했다면...


아마도, 손들기 직전까지 머릿속에서 완벽한 문장을 여러 번 만들어보고 손을 들었을 것이고, 그렇게 외운 문장을 유창하게(?) 모두 입 밖으로 내뱉은 다음에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국 친구는 달랐다. 단어만 나열하는 수준의 어설픈 영어였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전달했고, 또 대화의 상대방은 그의 의도를 100% 이해했다. 그의 영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났으면 다행인데, 그의 지극히 효율적인 영어를 불행히도 다 알아들은 미국인 임원이, 질문에 대한 상세한 대답을 늘어놓았고, 그 긴 대답 끝에 설상가상으로 마치 성문 종합영어의 예문과 같은 문법 오류 없는 문장으로 그 중국직원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이다. 참 눈치도 없어.


"Besides the population, are there any other reasons why we should invest more in China?" (총인구수 말고 또 중국에 더 투자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강단에 서 있는 임원을 비추던 카메라는 다시 그 직원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ppt 화면이 차지했던, 임원 뒤의 그 커다란 스크린에는 그 중국인 직원의 둥그런 얼굴이 다시 클로즈업됐다. 그는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 다들 긴장하면서 스크린 속의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스크린 안에서, 중국팀의 직원은 잠시 침묵하다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Thank you."


그 순간, 수백 명 청중의 웃음이 터졌다. 그 많은 사람들은 또한, 우레와 같은 박수로 그를 격려했다. 그 중국인 직원은 질문은 했지만, 미국인의 답변과 질문을 잘 알아듣지는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난 이 직원이 지금쯤은 영어가 유창해졌을 것이라는데 다시 500원을 걸겠다. 이후로도 많은 회의 또는 회식 자리에서, 타 국가 직원들의 배짱 영어를 여러 번 경험했었다. 한국 직원들은 대체로 늘 조용했다.


수백 명의 청중 앞에서 깊게 고민하지 않고 손부터 든 '배짱'. 문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용기'. 못 알아들었지만 'I am sorry.' 대신 'Thank you.'로 상황을 정리한 '결단력'.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아이한테 꼭 필요한 스킬이기도 하다. 아, 그러고 보니 수업 시간에 답도 모르면서 손부터 들긴 한다. 배짱만큼은 새 가슴인 아빠하고 다르다. 다행이다.


한국인에게는 왜 영어가 어려울까. 왜 문법을 틀리면 부끄러운 일일까. 왜 발음이 "버러"야 된다고 생각할까. "버터"라고 해도 알아듣고, Korea small. China big. 해도 알아듣는데. 상대방이 못 알아들으면 한 번 더 얘기하면 되는데.


회사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료 중에도 이런 친구가 있었다. 전화 회의 (콘퍼런스 콜)는 대면 회의보다 몇 배는 힘들다. 테이블 가운데 스피커폰을 켜놓고, 여러 명의 직원이 둘러앉아 머리에 쥐가 나게 스피커폰에서 쏟아지는 영어에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늘 영어 단어 몇 개로 의사소통을 하던 동료였다. 영어 단어 몇 개로 구성된 문장이었지만 - 중국 지사 직원처럼 - 망설이지 않고 다시 질문하고,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이메일로 좀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뻔뻔한) 용기 있는 모습에 처음에는 놀랐었다. (참석자 대부분은 말을 안 한다.) 이후 팀이 바뀌면서 오랫동안 같이 일할 기회가 없었는데, 몇 년 후 만난 그 친구의 영어는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단어 몇 개로 소통하다가, 문장으로 소통하고, 그렇게 하면서, 외국인 동료의 표현을 따라 하게 되고. 당연히, 영어가 엄청 많이 늘었다.



그렇다. 자꾸 하면 뭐든 늘게 마련이다. 운동도, 악기도, 심지어 술도. 외국어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입을 잘 안 연다. 이게 우리의 가장 큰 문제다. 이곳에서 만난 기러기 엄마들도 비슷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조용히 한국말만 했다. 영어가 안되니까 한국인 엄마들하고만 어울렸다. 한국인 엄마들끼리 한국어만 하니, 외국 살지만 영어 잘하는 것은 남의 얘기가 된다. 집에는 한국 엄마들만 아이들과 같이 놀러 온다. 자연히 아이는 한국 아이들하고 많이 놀게 된다. 그러면서, 아이의 영어가 빨리 늘지 않는다고 고민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문법 위주로 영어를 공부하며 simultaneously를 "시물타네오우슬리"로 읽고 스펠링을 외우며, 외국어를 책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영어를 원어민처럼 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놀라운 일이 아닐까. 한국인보다 유창한 한국어로 우리를 놀라게 한 미국인 방송인 타일러나 가나 출신의 방송인 샘 오취리의 경우를 보자. 이들이 한국어를 학교에서 배웠을까. 한국어 Vocabulary 22000을 공부했을까.


외국계 회사 오래 다녀보니 실수와 부족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영어의 벽을 넘는 첫걸음이었다. 단어 공부나 회화 학원보다, 예의 바른 한국인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뻔뻔함이었다. 나도 그래서 브런치에 부족한 글을 뻔뻔하게 계속 올리고 있다.



- 뻔뻔한 아빠의 솔직한 육아와 교육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참, 내 아이도 뻔뻔하게 키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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