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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엔 사진일로 만났다

사진에 담아야 하는 마음을 후배에게서 배운다

"못 찍겠어요."


한 번은 잔뜩 화가 나서 웃질 않던 손님이 있다. 주문한 촬영용 의상이 안 왔다는 것이다. 거개 작가들처럼 손님 본인 실수라며 탐탁잖아진 마음으로 그런 손님을 성심으로 대하지 못할 법도 한데, 그는 대기실에 들어가서 30분을 그 손님을 달랬다. 자기에게 찍히러 온 사람이 이곳을 나갈 때,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나가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그 손님은 결국 대만족을 하고 갔다. 지나고 살펴보니, 베푸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그의 마음이 찍은 사진에서 피어났다. 좋은 사람은 좋은 사진을 찍는다.


6년 전이었나. 사람을 구하는데 그가 찾아왔다. 보통 이쪽에는 단정한(?) 이가 드물다. 예체능 쪽엔 '반골'이 많았던 것 같다. 대다수가 가는 길과는 다른 길을 걷겠다는 데는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렇게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고 한 발짝씩 내딛는 이들이 평범해 보일 리가. 개성 어린 모습은 아마 방어기제였을 것이다. 나 이만큼 특이한 사람이니 취급에 주의하시오. 나도 약간 그런 심정으로 새긴 타투가 벌써 예닐곱이다.


그런데 그는 아주 멀끔했다. 날씨로 치면 구름 일절 없이 환한 날처럼, 겉 하고 속이 똑같이 화창하게 보이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왔다.


"사진이 너무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사람들은 거개 구직 면접에서 본인이 무얼 잘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그런데 그는 주로 사진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했다. 꼭 해야겠다는 초보의 초심 같은 게 보였다. 그런데 그땐 말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직장이 P사라고 했다. 좁은 문의 기업. 거길 들어가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내가 다 아까워서 자격도 없는 오지랖을 부렸다. 사진 하면 먹고살기 힘들어요. 취미로만 하는 게 어떨까요.


두 번째 만났을 때 이미 그는 사표를 던진 후였다. 우리 회사든 아니든 그는 가슴에 품은, 생각보다 더운 불꽃이 있어서 사진을 해야 했던 거다. 이래저래 알게 된 분들과 공용작업실을 차려서 사진일을 하며 지낸다고 했다. 지난번 그의 마음을 내가 뭐라고 과소평가했던 게 부끄러웠다.


그러다 결국 인연이 맞아 일을 같이 하게 됐다. 쉴 새 없는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우리는 중간중간 갖은 핑계를 만들어 술을 마셨다. 사진 하는 이야기와 사진으로 먹고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참 잘 갔다. 새 직원이 들어온 날은 제일 신나는 날이었다. 밤새도록 사진이 이러쿵저러쿵 하다가 또 그다음 날 스케줄을 소화하고, 하여튼 미련하고 천진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직원 수가 제법 되게 되었는데, 그다음 고민은 균형과 성장이었다. 우리가 사진 시작할 때랑 다르게, 지금 사진을 새로 시작하는 어린 친구들은 조금 덜 고생시키자고. 그러기 위해서 역량을 더 강화하자는 뭐 그런 이야기였다. 대기업 같을 수는 없더라도 어제보단 낫게 해주자고 들면 비용이 들어간다. 이익이냐 복지냐. 이럴 때마다 내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와 상의했다. 꿈의 깊이가 깊었던 그가 바라는 세상은, 후배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와 논의를 하고 나면, 이익 쪽으로 기울던 나의 욕심도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내가 더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가리켜주는 나침반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시행착오도 참 많이 했다. 그도, 나도, 직원들도 다들 처음 겪어보는 길을 걷고 있던 거였으니. 치르지 않아도 될 법했던 비용을 치르기도 하고, 먼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얼마 전 독립을 했다. 본인이 이 판에 들어와 갈고닦은 이념을 실어서 어여쁜 가게를 차렸다. '하루를 돌아보는 저녁과 같이'라는 슬로건으로, 찾아주는 이들의 어둑한 저녁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사진관. 둘러보면 흠칫흠칫 놀랄 만큼 정이 그득한 좋은 사진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그의 사진 세계는 이미 훨씬 오래전부터 청어람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로 살다 보면 왕왕 슬럼프에 빠진다. 어쩌면 슬럼프 상태가 기본값일지도 모르겠다. 찍은 사진이 마음에 안 들고, 셔터에 검지를 대기가 두렵고 그런 나날들이 있다. 한 번은 딱 그런 상태인 내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말했다. 좋은 사진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단 말이 참 좋았어요. 우리 회사 모토를 두고, 그게 자기 길잡이 같다고 해 주던 마음씨에서, 다시 셔터를 누르고 싶다는 용기를 얻곤 했다. 그를 만나고 내가 깨닫게 된 길잡이는, 멀고 힘든 길일수록 같이 걷는 동료가 주는 힘이 빛을 발하더란 거다. 선배만 후배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후배도 선배가 가는 길을 밝혀준다.


하여튼 이렇게 해서 같이 일하는 시간은 끝이 났다. 어딜 가더라도 우리가 같이 고민하던, 사진에 담아야 하는 마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나가는 작가로 잘 살 것이다. 아마 그와는 사진이 아니라 그 어떤 직업에서 만났어도 똑같은 시간을 보냈을 것 같다. 부대낄 때 중요한 건 일 자체가 아니다.


그가 독립하고 나서 가장 아쉬운 점이 있는데, 끝나고 술 한 잔을 못한다는 거다. 이제 몸은 멀리 있지만, 그때 먹던 전거리에 막걸리잔으로 혼자 건배를 한다.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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