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길을 잃은 지는 사실 아주 오래됐다. 나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지금 가던 길을 계속 따라가길 원했다. 길을 바꾼다는 건 무척이나 두려운 일이니까.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다는 것. 물론 스물도 특별했고 서른도 마찬가지였지만, 마흔이란 나이는 인생에서 큰 전환점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도 마흔을 ‘중간 항로’ middle passage로 표현했다. 말 그대로 정말 인생의 절반인 시점이겠지. 이제 한 살 한 살 더 먹을수록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적다고 느껴질 나이.
그래서일까? 마흔을 앞두고 인생을 한 번 정리하고 싶어 진다. 요약본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소망을 기억하고 싶다. 이제는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인생을 다시 써야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맡아온 역할들을 빼고 나면, 나는 대체 누구인가?' 진짜 나를 찾는다는 건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래도 결국 이 말 밖에는 다른 표현이 없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페르소나(가면)를 쓰며 연기한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우리는 직장인을 연기하고, 아내와 부모를 연기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진짜 자신을 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마흔쯤 되어 깨닫는다.
그래서 내면의 자기와 후천적으로 생긴 성격 사이의 불균형이 너무 커져 버려, 더는 그 고통을 억누르거나 보상으로 달랠 수 없게 되면 위기가 찾아온다.
중간 항로는 후천적으로 만들어낸 성격과 '자기'의 욕구 사이에 무시무시한 충돌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이를 경험하는 사람은 종종 겁에 질려 "이제 내가 누군지조차 모르겠어."라고 말할지 모른다.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로 교체해야 하며, 과거의 나는 숨통이 끊어져야 한다. 그러니 엄청나게 불안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은 낡은 자신을 소환해서 죽여야만 비로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아. 정말 이렇게
나를 죽여야 하는 걸까.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되고 싶은 나. 이 운명적인 충돌과 죽음-재생 과정을 겪어야 새로운 삶이 등장한다. 이렇게 마흔은 삶을 다시 찾고 더 의식적으로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로 우리를 초대한다.
내 안의 용 만나기
심리학자 융은 우리 안에 ‘용’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용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우리를 삼켜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모든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는 엄청나게 가치 있음에도 홀대받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이 용은 어린 시절의 소망이기도 하고, 그동안 잊고 억눌려 왔던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애정을 보인다면, 그 보답으로 우리는 삶의 후반부 여정에서 막대한 에너지와 의미를 선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제는 용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융은 용을 만나기 위해먼저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라고 말한다. 사실 자아정체성은 인생 전반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이 목표를 놓친다. 자아정체성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채 인생 후반기로 접어든 개인은 성숙해지기 어렵다. 결국 길을 잃고 만다.
마흔의 일과 사랑
프로이트는 건강한 정신의 기본은 '일'과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는 직장과 가정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월급 주는 직장에 다닌다는 뜻이 아니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도전을 받으며, 이를 달성함으로써 보람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은 단순히 돈 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또한 애정관계도 더욱 성숙하게 이끌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자신의 소망을 남에게 투사하지 않는 것이다, 배우자에게 ‘네 탓이야’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자식에게는 자신이 살지 못한 삶에 대한 기대와 후회를 전가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내 소망’이다.
‘나 자신에 대한 비난’이다.
타인의 잘못이 아니다.
나 자신과의 관계 역시 중요하다. 스스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따라 타인을 선택하는 일은 물론 그 관계의 질 또한 달라진다. 모든 애정관계는 우리 내면의 삶을 보여주며, 어떤 관계도 우리 자신의 의식과 맺는 관계보다 나을 수는 없다.
어떤 길로 갈까?
융은‘나는 무엇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가?’ 하고 질문해보라고 한다. 부름은 우리의 소명을 의미한다. 하지만 소명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소명이 우리를 선택한다.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이 길은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사람은 영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다. 그 길은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길이다. 자기 자신의 모든 부분을 살피고, 이를 통합시키는 데 자신의 에너지를 어떻게 쓸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찾고’ ‘자기를 만들어낼’ 필요는 없다. 자기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를 무시하고 억압했을 뿐이었다. 자기와 이야기를 나눠 본다.
“너는 어떤 길로 가길 원하지?”
어쩌면 그는 그냥 가던 길로 쭉 가길 원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같은 길이어도 혼자 걸었던 길과 자기와 함께 하는 길은 분명 다른 느낌일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