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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위로를 건네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순 없으니까
<연년세세>를 읽고
by
여르미
Feb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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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작가를 처음 만난 건
책을 소개하는 팟캐스트
빨간 책방을
통해서였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막 출간한 작가는
방송에 출연하여 책과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었는데
그 이야기들이 참 와닿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나는 좀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소설은 못 읽는다.
우울한 소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황정은 작가의 책들은 그런 쪽이 많아
그녀의 책들은 선뜻 읽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반면 이번에 나온 <연년세세>는
엄마에서 딸들로 이어지는 단편 모음집이어서
조금 부담감을 내려놓고 읽어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유쾌한 내용이 나오진 않았지만 ㅎㅎ)
어찌 됐건, 작가들도 책을 술술 쓰진 않는다.
많은 글쓰기 책들에서 설명하고
또 글 못쓰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듯.
작가들은 흔히 말하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게 있다.
황정은 작가는 보통 새벽 5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글을 쓴다고 한다.
하루에 9매 정도 분량이 나온다고 하는데,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가끔은 꿈이
소설의 소재가 된다고 한다.
<연년세세>의 주인공들은 엄마와 두 딸 들이다.
전쟁과 식모살이, 그리고 이젠 딸의 아이를 돌보는
평생 고단한 삶을 살아온 엄마.
청춘의 초반부터 가장 노릇을 한 큰 딸.
세상에서 소수자로 살아온 둘째 딸.
(+여기에 아빠, 큰 딸의 남편, 그리고 아들이 있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세 모녀의 삶인 것 같다)
작가는 이들의 삶을 덤덤히 묘사하면서
굵직굵직한 한국사를 스쳐 지나간다.
많은 이들에게 가족을 잃게 했던 한국 전쟁,
촛불 시위와 이민 열풍.
워킹맘의 육아와 성소수자들 이야기까지.
어떤 이에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저 정도로 삶이 힘들어야 하는가'
하는 답답함도 불러일으키는, 그런 소설이다.
#1
하고 싶은 말
두 번째 단편 <하고 싶은 말>의 주인공은
첫째 딸. 한영진이다.
그녀는 백화점에서 이불을 판다.
그리고 꽤 유능한 판매원이다.
하지만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녀.
아이를 돌보면서 일을 하기 버거워
엄마를 자신의 아래층 집으로 모셔온다.
그리고 엄마는, 두 집 살림을 감당하며
청소와 밥을 차리고, 아이들을 돌본다.
(아. 난 이런 거 읽으면 너무 불편해서 눈 돌리고 싶다 ㅠㅠ)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가장이 되었고,
동생들과 부모의 걱정거리를 챙기는 큰딸이었다.
#2
생각을 덜 할 뿐인 남편
갈등이 없으면 소설이 아니다.
큰딸 한영진의 가족은 삐걱거린다.
그녀는 남편과도, 어머니와도,
그리고 아빠와 동생들과도.
모두 삐걱거린다.
공감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그러기엔 너무 오랫동안 참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조차 추스르지 못했다.
가족을 비난하고 더 나아가 용서하기엔,
내가 빚진 것도, 필요한 것도 너무나 많다.
한영진의 남편은 가족에게 무관심하다.
하지만 한영진은 남편을 비난하지 못한다.
엄마가 자신의 아랫집에 이사 올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이 보증금을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실망스럽고 두려운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그녀는 남편에게 특별한 악의가 있다고 믿진 않았다.
그냥 생각을 덜 하는 것일 뿐.
남편은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생각하지 않는 것
.
하지만 그녀는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너무나 많은 순간들을 조용히 참아온 사람이었다.
#3
하고 싶은 걸 다 할 순 없어
엄마는 늘 큰딸 한영진을 기다렸다
.
우리 집안의 기둥, 가장. 큰딸.
매일 그렇게 기다리며 그녀가 밤늦게 오면
항상 새 밥과 새 국을 내왔다.
그럼 한영진은 밤마다 꾸벅꾸벅 졸며
그 밥을 먹었다.
월급을 받으면 월급봉투를 내려놓으며,
자부와 경멸, 환멸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살다 보면 정말 진리인 말들이 있다.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 순 없으니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그 마음.
특히 가족에 매여 있는 사람들일수록
그 간절함과 어쩔 수 없음을 느낀다.
장녀인 한영진과 두 동생은 다르다.
두 명의 동생들은 자유로운 삶을 산다
.
일정한 수입도 없고, 앞으로의 계획도,
결혼도, 아이도.. 그 어떤 구속도 없다.
어쩌면, 그녀가 하고 싶은 걸 포기했기에
동생들이 자유롭게 사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누군가는,
이 모든 짐을 짊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4
거짓말
이 단편은 거짓말. 하면서 끝난다.
거짓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말일까.
엄마와 살갑다는 게 거짓말일까.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그 말이 거짓말일까.
사실 이 짧은 단편 속에선
다른 여러 거짓말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참.. 짧은 소설에 이렇게나 많은 사건들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게 대단한 것 같다.
더 많은 거짓말은 스포가 될 것 같아.. 남겨둡니다^^)
#5
나의 엄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삶 속에서 너무 많은 희생을 하신
나의 엄마가 생각이 났다.
가장 떠올랐던 기억은
고3 무렵, 딸의 수능을 위해
매일 일찍 일어나 백일기도를 하셨던,
새벽 밥상을 차려주셨던
엄마의 둥근 그 뒷모습.
그리고 아이를 낳았을 때,
산후조리원을 막 나와 집에 왔을 때,
아직 모성이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아
아이와 덩그러니 둘만 남으면
어쩔 줄 몰라 했을 때.
능숙한 솜씨로 아이를 돌봐주시고
나를 위해 미역국을 한가득 끓여주셨던
그 따뜻한 뒷모습도.
사실 나는 엄마와 그렇게 살갑진 않다.
전화도 일주일에 한 번 겨우 할 정도니까.
항상 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원했고
그런 면에서 나는 장녀이긴 하지만
한영진보다는 두 동생들과 더 닮았다.
한영진은 끝내 말하지 않는다
.
그리고 한영진의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 대신 망가진 신발을 탓하고,
이제 너무 늦었으니 자라고 말한다.
때로는 묻지 않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
+단편 중 대표작은 내 생각엔
한영진 엄마의 어린 시절이 그려진
<무명>
인 것 같다.
(작가님은 1946년생 순자 씨의
피란 이야기를 듣고 썼다고 한다)
+가장 신선했던 단편은
한영진 여동생 이야기인
<다가오는 것들>
이다.
이 단편은 짧지만 강렬하다.
(중간에 납작 복숭아가 나오는데,
작가님이 복숭아를 가장 좋아하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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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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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500권의 책을 읽는 책탐식자. 3년 연속 1등 네이버 도서 인플루언서. 본업은 16년차 치과의사. <마흔에 읽는 인문학 필독서 50>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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