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대화하기 XXV
인간은 지각하는 마음과 생각하는 마음을 모두 갖고 있는데, 그 두 마음을 구분하지 않아서 마음, 언어, 기호, 상징, 욕구, 욕망 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혼란을 가져왔다.
최봉영선생님의 책 <본과 보기 문화이론> 106쪽에 나오는 문장이다. 쉽게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말습관에서 둘을 구분하며 쓰지 않았던 듯하다. 아니 '욕망'은 금기어에 가까웠고, 그나마 '욕구'란 말은 의도적으로 근래에 자주 쓴다. 최근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욕구'란 말을 자주 쓰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고, 그래서 '용기 있다' 거나 '평범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은 일이 있다.
사람들이 왜 그러한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해는 불가능하다. 나에 대해 살펴보면, 언젠가부터 개관적 정보나 시각 다시 말해서 언어로 접하는 남들의 생각이 아닌 내면을 지향하게 된 사건이 있기는 했다. 그게 언제인지는 기억도 흐릿하고, 추정도 어렵다. 아무튼, 그 후로 나는 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다고 믿는데, 그래서 욕구와 욕망을 다루는 텍스트를 관심있게 읽는 듯하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자.
인간이 지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을 욕구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 감각하는 몸에서 발생하는 요구가 욕(欲)에 해당하고, 특정한 관계 맺음을 통한 해소가 구(求)에 해당한다.
저자(최봉영선생님)는 지각하는 마음과 생각하는 마음을 구분하자고 제안했다. 그에 따라,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고 있다. 일단, 한자 공부를 잠깐 하면 욕(欲)은 '하고자 할 욕'자이고, 구(求)는 '구할 구'자이다. 지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한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는 행위는 사이다스럽다. 반면에 욕구 해소가 관계 맺음을 통해 풀린다는 부분은 직관적이지 않고 학문적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책 4장을 다 읽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책 역시 문장놀이의 일부이기에 자연스럽기도 하다. (책을 안 읽은 독자님들께는 필자는 아직 책의 생각을 따라갈 뿐이라 시간순으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글을 쓰지 못함에 대해서 양해를 구한다.)
아래 문장은 욕구의 독특한 특징을 묘사한 듯도 하다. 왜 욕(欲)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충족을 할까?
인간은 감각적 요구를 일으킨 원인들을 직접 제거하는 방법으로 욕구를 충족한다.
흔히 말하는 의식주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미 현대 대한민국 사회 절대다수는 의식주 결핍이 중요 문제가 아니다. 의식주는 굉장히 후진 개념화란 생각을 처음 해봤다. 그런 점에서 매슬로우 욕구 단계설은 훨씬 효용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결핍의 제거라는 면에서는 의식주가 저자의 '제거'라는 표현에는 상응하지만, 매슬로우 욕구 5단계와 '제거'는 어울리지 않는 듯도 하다. 매슬로우의 구분은 욕구와 욕망을 (저자식으로) 나누지 않은 탓일까?
인간이 생각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으려는 것을 욕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욕망이란, 생각하는 마음이 사태와 연관하여 발생한 욕구를 문장의 형식으로 규정하여 충족하려는 것을 말한다. <중략> 인간은 자연상태를 벗어나 문화의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 이때 생각하는 마음으로 욕구를 문장의 형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욕(慾)에 해당하고, 특정한 관계 맺음을 통해서 충족을 소망하는 것이 망(望)에 해당한다.
욕구의 욕(欲)이 '하고자 할 욕' 자인 것과 달리 욕망의 욕(慾)은 '욕심 욕'자를 쓴다. 이에 대해서는 저자의 설명이 꽤 유용하다.
이런 까닭에 慾望의 慾은 欲求의 欲과 달리 바라봄의 주체인 心이 붙어 있다.
한편, 아래 문장은 단번에 이해되지는 않았다. 왜 충족을 바라는 망일까? 생각이 더 쉬운데...
직접적인 구(求)가 아니라 충족을 소망하는 것이 망(望)에 머문다.
이 글을 쓰며 다시 보니 생명을 원천으로 하는 욕구보다는, 물론 몸에 기초하지만 생각에서 발로한 욕망이 실천력이란 측면에서는 동기가 약한 이치로 받아들였다. (몇 시간에 전에 시청한 도올선생 몸철학 강의 내용이 영향을 끼친 바도 있을 테지만, 인과관계를 설명하긴 어렵다.)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반해 실제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드문 일로 설명이 되리라 본다.
처음 읽을 때는 낯설기만 했던 '문장놀이'라는 말이 익숙해진 느낌이다. '우리의 세계'라는 표현에서 또 다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읽을 때의 강렬한 느낌이 살아난다. 사피엔스만이 가능한 '허구의 세계'를 깨달았던 순간.
인간은 문장놀이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로 엮여 있는 '우리의 세계'를 정밀하게 구축해 나간다. 그 결과 인간은 '나'의 개인적 취향보다 '우리'의 문화적 이상이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중략> 인간은 단순한 욕구를 끝없는 문장의 세계에서 현란한 수식을 덧붙여 형형색색으로 욕망을 드러낸다.
인용한 문구와 관련하여 요즘 일상에서 거의 매일 관찰할 수 있는 '문장놀이' 사례가 있다. 자신의 소비나 시간을 보내는 내용을 주제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