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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Nov 06. 2021

육아란 무엇인가?

진한 일상의 기록 8편

바로 이 사진을 찍을 때 감상을 남긴다.

사진을 찍기 직전까지 마음이 매우 시끄러웠다. 아이가 굳이 전동공구를 찾아와서 장난감처럼 노는 모습에 불편한 감정이 올라왔다. 다행히 감정을 담은 말을 그대로 발화하는 대신 ‘무슨 말로 못하게 할까?' 생각하는 나를 잠시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다.


습관적으로 하려는 행동을 멈추면 보이는 것

가장 먼저 화부터 제압해야 했다. 다혈질인 나에겐 자주 맞나는 내면의 적이다. 적이라 표현했지만, 나를 성장시켜준 힘 또한 분노이기 때문에 다혈질 자체를 문제삼을 수는 없다.


문제는 화를 담아 바로 발화하는 습관이다. 사진을 찍던 그날 아이를 주시하며 관조하던 내면의 생각은 이렇다. '왜 하고많은 장난감을 놓아두고' 굳이 손 안닿는 곳에 놓인 전동공구를 찾아 오는걸까? 이 질문은 화를 다스리던 단계에서 장난감을 사주는 이들의 욕망으로 관심을 옮기게 했다.


우리 아이 장난감을 보면 대개는 어른들이 산 것이다. 그 안에는 구입한 사람의 욕망이 들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행하는 장난감, 비싼 장난감 혹은 또래 다른 아이가 갖고 좋아했던 모습을 봤던 장난감, 그 나이에 이런 행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사주는 교구 성격의 장난감 등등.


물론, 아이가 장난감을 좋아하긴 하지만, 어른들 생활용품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려는 경우도 흔히 있다. 왜 그런지 분석하는 일은 내겐 중요하지 않다. 생각이 여기에 도달하자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한다. 많은 경우 여기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감정을 담은 말을 바로 발화하지 않을 때, 바로 ‘육아하는 나’에 대한 제어권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제어권을 얻지 못하면 습관처럼 내가 자라면서 보고 들은 그대로 행동한다. 의식하고 하는 행동이 아니고, 잠재의식이나 무의식이 이끄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나 다른 어른이 나를 대한 방식 그대로 행했다. 이  경우 무서운 것은 잠재의식으로 하는 행동이라 내가 그런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기도 어렵다.


다행스럽게 아이를 낳고 한동안 내가 아이를 대할 때, 아내가 나를 자꾸 제지했다. 제지 당할 때는 불편한 마음이 있었지만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면에 질문을 해보면 여지없이 '아무런 기준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한 것이었다.


걸러내야 할 근거없는 조언들

아이가 생기고 나서 아이를 키워본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조언을 했다. 조언자에 대한 존중이나 존경으로 더러는 의심없이 그들이 시키는대로 행한 일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는가 생각하기 시작한 후에, 돌아보면 그들의 조언은 대부분 틀렸다. 그들도 무심코 배운 것들이 많으며 근거도 미약하고 (육아 자체가 아니라) 훈육에 대한 조언들뿐이었다.


훈육과 육아를 구분하면서, 나는 적어도 아이가 하나의 인격체라는 점에서는 어른과 별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을 하는 이들은 아직 어릴 때 익힌 잘못된 습관을 스스로도 극복하지 못한 경우가 아닐까 짐작한다. 아이는 미숙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어른도 미숙한 부분이 많다. 의사소통이나 감정을 다루는 점으로 좁혀서 보면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나은지 섣불리 말할 수 없다.


아무튼 아이들이 어른들과 별 차이 없는 인격체란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육아는 달라진다. 동물들의 경우처럼 그저 보호 필요하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기준이 달라 혼란을 겪는 일을 줄이기 위해 부부가 같은 기준을 제시하는 노력하다. 우리 집은 아이 엄마가 육아의 반 이상을 맡기 때문에 아내의 기준에 배경을 둔다. 위험한 일만 금하는 아내의 기준을 따라 '위험한 행동은 안되' 라고, 기준만 제시하고 그대로 두고 (보호자 역할에 집중해서) 지켜보았다.


육아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지켜보는 일은 의무로 짐을 지우고, 딴짓을 하지 않기 위해 몰입하려고 하면서 아래 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이 바로 몰입과정에서 떠오른(혹은 몰입을 하지 못해 떠올린) 생각이다.


어느날 아내가 육아의 궁극적 목적이 무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이어서 바로 아이를 독립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나는 큰 애가 5살일 때 눈을 마주 보고 어떤 이야기를 했던 날을 기억한다. 무언가 말썽을 부려 타이르는 말을 했다고 기억하는데 정확치가 않다. 그날 낮에는 서른이 한참 넘었으나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직원에게 그들과 교류하라는 말을 했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마음 속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으며 그저 불편한 대화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랬다. 나는 그에게 8개월 동안 시간을 주었으나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이때 성인이 아이보다 결코 성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그 후로 더 많은 사례를 경험했다.


육아가 무엇인지 나는 정의할 수 없다. 다만, 아직 어린 두 아이와 마주할 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이들과의 관계를 잘 차려가는 ‘육아’를 실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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