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Dec 01. 2021

나를 이해하는 함께성과 따로성

묻따풀 훈련 No. 10

거의 스무날만에 묻따풀을 이어간다.


우리말 가운데와 중국말 中의 차이

어느날 최봉영선생님과 통화를 하는 가운데 물어보셨다. 내가 알리는 없고, 한참 설명하신 내용이 알고보니 기고하는 내용을 다룬 말씀이었다.


내 자유만 따지는 사람들

우연하게 페북에서 본 글과 아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 글을 보며, 코로나 창궐 국면에 서방국가와 달리 우리나라는 마스크 착용에 대한 공감이 쉽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낱낱이 저만 따로 하는 <만>의 단계

그리고, 다시 최봉영선생님이 두 달 전에 보내주신 이미지를 찾아냈다. 유아기에 인간은 나만 인식한다. 문제는 유아기를 지나 법적으로 성인이 된 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반면에 설사 다른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자신은 해내는 <라도> 혹은 <만이라도> 단계가 있다. 누군가는 그런 노력을 점수(漸修)라고 불렀다. 나는 그런 상태와 그런 사람을 사랑한다.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쪽인 <나>와 함께성

나는 함께성이라는 말을 올해 처음 들었다. 최봉영선생님은 친절하게도 이 매력적인 말이 무슨 뜻인지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보내주셨다. 다만, 내가 이걸 다시 열어서 바라보는데 걸리는 시간은 한달이 훌쩍 넘었다. :)

아름이 무슨 말인지는 모른다. 여기서는 다루지 말자. 나만 생각하는 <나>와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쪽을 이루는 <나>가 있다. 이정도는 독자들도 감각할 수 있지 않을까?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말이지만 '공사구분' 이라는 낡은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함께성과 따로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듯하다. 마치 음양이 공존하는 것처럼.

작가의 이전글 실전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 적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