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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Dec 20. 2021

물건들 속에서 허우적대는 세상

소비자 공학 연구 No. 3

와우. 물건들 속에서 허우적대는 세상이라니! 통찰이 넘치고 매력적인 이 문구는 무려 프롤로그의 제목일 뿐이다. 프롤로그속에는 또 다른 촌철살인의 문구가 있다.

홍보라는 단어에 대한 버거의 견해처럼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이해하게 된 사람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다.


언어, 그것은 인간이 만든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다

그렇다. 욕망을 이해하는 단초 역시 말이다. 아래 그림을 그리신 최봉영선생님은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 자체가 만드는 시공간이 메타버스로 설명하는 듯했다.

그 중에서도 사물이 말을 걸어 그 안에서 우리가 허우적대는 세상이라고 묘사하는 이가 있다. 이 글은 데얀 수직의 책 <사물의 언어> 에서 언어 부분을 읽고 쓴 글이다. 이 책을 구입한 동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제목을 키워드로 페이스북 검색을 해도 단서를 찾기 어렵다. 제목과 표지에 끌려서 산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나는 이 책을 소비자 공학 연구 관점에서 읽는다는 점이다.


소비주의의 몽롱한 황홀경

소비주의라니? 그렇지! 내가 아이들이 TV 볼 때, 완구 구매를 자극하는 광고에 대해 경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애플 제품이 나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구매욕'에 대해 페이스북을 하는 수많은 지인들도 떠오르고...

고객을 유혹하게끔 디자인된 매장이 있는가 하면, 고객 스스로 결정하게 내버려두는 곳도 있는 법이다. <중략> 공항에서는 매혹이나 최면, 뉘앙스나 아이러니가 힘을 발휘하기에는 시간도 공간도 부족하다. 거기서 이루어지는 건 가장 무뚝뚝한 종류의 거래다.

그리고, 저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애플이 만든 물건에게 빠지는 순간을 정교하게 묘사한다. (이 글도 맥북으로 작성 중이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전적으로 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련의 유혹과 조작에 근거해 이루어진 구매였다. 이 노트북이 어떻게 해서, 내가 결국 돈을 지불하고 그 자리에서 가져가야 직성이 풀릴 만큼 가지고 싶게 만들었는지를 이해하면 나 자신에 관해서도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또한 현대 세계에서 디자인이 맡게 되어 있는 역할에 관해서도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혹시... 퍼뜩 UX와 소비를 연결하는 인사이트가 뇌리를 스친다. (다음 이야기거리로 뇌안에 그대로 두자)


중요한 것은 실용성이 아니라 바로 소유욕이다.

실용성이라는 알리바이로 무장한 또 하나의 호들갑스러운 장식일 뿐이지만, 소유욕의 혈맥을 정곡으로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2년에 한번 쓰던 제품을 내던지게 하기

많은 분들이 공감할 애플의 마법에 대한 이야기다.

2003년 뉴욕의 애플 매장에서 처음으로 노트북을 구입했을 때, 나는 그 컴퓨터와 함께 늙어가게 될 거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중략> 애플은 빌 게이츠의 소프트웨어와 중국산 하드웨어가 장악한 세상에서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디자인을 미끼로 해 자신들의 제품을 경쟁사들이 판매하는 물건들에 대한 욕심나는 대안으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중략> 그러려면 지속적인 유혹이 필요하다. 소비자들이 2년에 한 번식 쓰던 제품을 내던져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갈망을 한껏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나는 비록 노트북은 6년째 쓰고 있지만, 애플의 폰과 무선 이어폰은 2년 주기 교체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외양 디자인탓이 아니라 2년이 지났더니 배터리가 재구실을 못한다. 이 역시 디자인으로 보면 페친들이 애플의 새로운 수장을 '마진 쿡'으로 부르는 일에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건을 수단으로 삶의 경과 측정하기

그에 반해 수십년간 우리 곁에 머문 소유물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유혹의 꽃이 시드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에 대한 열정은 거의 구매가 완료됨과 동시에 사라지고 만다. 욕망은 그 물건이 헌 것이 되기 훨씬 전에 희미하게 지워진다. <중략> 우리가 결코 그들의 제품을 실제로 소유하지는 못하며, 단지 다음 세대를 위해 그 시계를 맡아 돌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계급의식에 대한 통찰이며, 사물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중략> 이런 쓸모없는 물건들 중 소수만이 수집이라는 묘한 생태계의 일부로 경제순환에 다시 진입한다.

알듯 말듯한 표현들이다.


현대인은 주로 취향에 돈을 쓴다는 나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물건들을 수단으로 우리 삶의 경과를 측정한다. 물건들을 사용해 우리 자신을 규정하고,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존재가 아닌지 표현한다. 때로는 보석류가 이 역할을 맡고, 때로는 집 안에서 사용하는 가구나 지니고 다니는 개인 소지품, 또는 입은 옷이 이런 역할을 한다.

디자인을 홍보에 빗댄 머릿말이 생각나고,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인플루언서 현상이 떠오른다.

오늘날 가장 세련된 디자이너의 역할은 형식적이고 기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 아니라, 스토리텔러가 되어서 디자인이 그러한 메시지들을 전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언어를 비교적 능숙하거나 흥미롭게 다움으로써, 히스로 공항에서 나의 맥북이 내 귓가에 속삭인 것과 같은 종류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디자인에 대한 비교적 고전적인 정의다.

디자인이란 사출성형에 관해, 또는 모니터 화면의 예리한 모서리를 무디게 만드는 데 필요한 정확한 곡선의 각도에 관해 오랜 시간 골몰해온 사람들의 익명의 대량생산품들을 창조하는 일에 관한 것이다. 또한 감촉과 사용감이 좋은 물건을 만드는 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감촉과 사용감이란 표현을 읽는데, 주말에 겨울나기를 위해 산 극세사 이불의 부드러운 촉감이 떠오른다. 디자인은 이렇게 스토리텔링과 이어지는 것일까?


현대의 디자인은 다국적 생산과 조립에 대한 경험과 지식도 요구한다.

서구에서 저비용 생산업이 침체된 것도 디자인 과정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한 산업 디자이어에게 새로운 자전거나 시계를 '디자인하라'고 요청한다면, 그 과정에는 아마도 중국으로 가서 수많은 다양한 부품들 중에서 선택하는 과정이 포함될 것이다. 그런 다음 독특한 개성이 표현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부품들을 조립할 것이다.


루이 설리반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FFF 원칙이 떠오른다.

디자인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스타일과 본질로 양극화되어서는 안 된다. 사물의 표면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 표면 아래 무엇이 있는지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는 디자인의 직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 설명하는 듯한 내용이다.

디자이너에게 맡겨지는 것은 표면과 외양과 미묘한 의미론적 뉘앙스이며, 우리는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 물건이 자신에 관해 들려주려 하는 말을 해석하거나 이해하게 된다. 그 메시지들은 그 물건이 어떤 일을 하며,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부터 스위치를 켜는 방법까지 다양하다. 결코 사소한 것이라 볼 수 없는 이런 메시지들이 바로 디자이너를 스토리텔러로 만든다. 디자인이 언어라는 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들려줄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있는 사람만이 그 언어를 유창하고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저자의 설명하는 디자인의 생산물중에는 컴퓨터공학이 아니라 산업변화 관점에서 소프트웨어를 생산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건들이 실용적인 것을 넘어선 무엇을 의미한다는 전제가 의심스러운가? 그렇다면 활자체typeface의 형태를 결정하고 개성을 부여하는 세세한 뉘앙스들로부터 우리가 읽어낼 수 있는, 가독성을 훨씬 넘어서는 정서적인 내용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그것은 '얼굴face'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활자체에는 사람의 얼굴처럼 성격과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 예시중에 하나가 인터스테이트체라는 폰트다.

인터스테이트체는 그 외의 다른 여러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이를테면 그 폰트만 보면 단어 하나 읽지 않고서도 자신이 고속도로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고속도로에 있다는 사실도.

물건의 상징성 디자인

아래 내용을 읽고 주제를 붙여 보았다.

물건들에는 기능과 용도라는 빤한 주제 말고도 이해해볼 뭔가가 담겨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건들이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는 것 못지않게, 그 물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색하면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러한 상징성을 만드는 매개체를 (최근) 소프트웨어라 부르곤 한다. 컴퓨터 공학에서 말하는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순수 디자인 산물이 물건이 되는 것이다.

때로 디자인은 우리 자신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고, 소유물로 즐거움을 느끼거나 돋보이기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우리의 의지를 사정없이 이용함으로써, 한때 진지하고 그 자체로 자연스러웠던 제품들을 어른들의 장난감으로 만드는 부정적인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흔히 콘텐츠라고 부르는 저작물 역시 비슷한 성격을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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