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제주에 살면서 미디어 아트를 처음 접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는데, 몇 년 사이에 곳곳에서 이를 활용하니 '아트'란 말이 무색했다. 그러다가 10월 어느 주말 아이가 가고 싶다고 조른 전시회에 갔더니 벽에 투사한 영상에 공을 던지며 상호작용하는 공간이 있었다.
이걸 딱히 부를 말을 몰라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미디어 아트가 보편적인 기술이 되었네요
그랬더니 아내의 답은 이랬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요. 미디어인지 아트인지 모르겠다고
아르떼뮤지엄에 가면 둘째가 엄청 좋아해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코너가 있다. 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스캐너 위에 올리면 화면에 금세 영상으로 나타난다. 아이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어른인 나도 처음에는 신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2년 사이에 가는 곳마다 있다는 인상이 느낄 만큼 흔해졌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하나는 서로 다른 종류의 정보를 융합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의 힘이다. 그래서 디지털의 시대에는 종합하는 역량이 중요해진다.
두 번째는 최근 <린분석>을 함께 읽는 동료가 알려준 일화다. AI가 웹툰 작가들의 아우라를 빼앗을 수 있다는 현상 해석이었는데, <월말김어준>을 통해 이름만 들어본 발터 벤야민의 이름으로 검색을 했다가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유튜브 영상을 찾았다.
중세의 제의 가치는 성당과 같은 특정한 장소에 가야만 감상할 수 있었다. 이것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성스러움에서 아름다움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제의와 아름다움은 다른 맥락이지만 성당에서 느끼던 신비로움이 미술품 원작에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벤야민이 주장한 바는 사진기가 가져온 복제 기술 때문에 예술이 필연적으로 바뀐다는 점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원작보다 더 뛰어난 복제물이 등장하여 '감각적인 표면의 가치'를 뜻하는 전시 가치만 남는다고 주장한다.
유튜버는 모나리자 원본을 본 아이의 말로 전시 가치의 의미를 쉽게 설명한다. 해상도 높은 사진을 걸어두면 원본보다 뛰어난(?) 작품이 된다는 의미다.
심지어 동시 개봉하는 영화는 원본 자체가 없다는 말에 나는 '영화에서 원본을 따질 수 있다는 예술 역사에 바탕한 생각' 자체를 해본 일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영화는 전시 가치가 극대화된 예술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스토리 이후에 앤디 워홀을 조명하니까 그가 어떤 의미인지 미술 문외한의 입장에서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빌린 어린이 책에 깡통 괴물로 묘사된 앤디 워홀이 있어 아이와도 즐겁게 유튜브 영상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