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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ul 30. 2021

욕망의 두 형태에 대한 대화 II

책과 대화하기

어제 글에서 이어서 씁니다.


근대의 이해

최근 보고 들은 도올노자 강의와 <월간김어준> 철학 내용덕분에 아래 내용에 대한 이해가 쉬웠다.

근대 이전에는 문화적 이상을 인간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본질에 의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중략> 절대적인 기준으로 설명하였다. <중략> 이런 까닭에 근대 이전에는 문화적 이상을 욕망의 차원으로 분석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금기의 대상으로 설정된 욕망에 대해서는 어떠한 분석이나 비판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근대가 종교적 영향력을 극복한 시기를 의미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게다가 근대라는 개념에 관심도 없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는 부분이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절대신을 믿는 종교는 벗어나는 역사적 과정에 있구나 싶으면서도, 동시에 전통적 의미의 종교가 사라진 대신에 자본주의가 종교의 자리를 대치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뉴스나 TV에서 시장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종교 지도자들이 믿음을 강조하는 부분과 묘하게 닮았다. 그런데, 아래 내용을 보면 문화의 통제와 통합은 정반대로 하는 경향이 있다.

종교는 특정한 욕망에 대해 강력한 금기를 설정하여 욕망 부풀리기를 근원적으로 차단해서 문화의 통제와 통합을 쉽게 만든다.

저자가 말하는 종교는 서구 일반에서 말하는 종교이지만, 만일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 정의한 (우아한) 종교의 정의를 차용하면 자본주의는 도리어 욕망 부풀리기를 활용하여 문화의 통제와 통합을 쉽게 만든다. ;)


욕망 충족 측면에서 본 종교의 폐쇄성

책(96쪽)에 이런 내용이 있다.

서로 다른 종교가 만나는 경우 <중략> 극단적 불신과 반목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 사고가 풍부해지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는 <사피엔스>의 일부를 인용해본다.

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 <사피엔스> 306-307쪽

종교의 이러한 부정적 측면을 일반화 한 표현이 책에 등장한다.

다툼이 문화단위 사이의 정체성 싸움으로 비화되면 전쟁과 같은 극단적 충돌을 낳는다.

이 같은 이유로 나는 이념논쟁과 이념론자를 기피한다.


욕망 충족의 과정은 기쁨보다 고통

기쁨이 없지야 않지만, 나 역시 저자의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게 욕망 충족의 과정은 기쁨보다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오는 일이 많다.

위 구절을 보는데, 최근 VogerX 창업자 남세동님 페북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일부를 아래 인용한다. 

성공의 기쁨은 대략 짧으면 몇초, 길면 하루 정도 지속된다. 예전에 B612가 하루에 50만 다운로드씩 나올 때 그때 그렇게 며칠씩 기쁘지 않았다. 잠깐 기뻤고, 그냥 일하느라 바빴다. 더 예전에 라인카메라가 유료화 첫날에 기대했던대로 매출 1천만원 이상 찍었을 때 그때 하루 종일 매우 기뻤다. 하지만 그 뒤로는 과연 이 매출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 궁금했지 마냥 기쁜 상태는 아니었다. <중략> 크고 작은 성공을 몇 번 해 보면 그 성공의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실 결국 성공이라는 결과를 위해서 일하는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중략> 오히려 괴로움은 오래간다. 

근래 읽었던 故 신영복선생님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에서 아래 내용을 읽은 부분도 떠올랐다.

더 많은 사람, 더 고된 생활은 마치 더 넓은 토지에 더 넓은 뿌리로 서 있는 나무와 같다고 할 것이다.

여기에 기초해보면 고통의 상당 부분은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 혹은 개인에 머무리는 작은 욕망을 문화 단위의 큰 욕망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비롯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다음 인용문을 보면 기쁨과 고통의 양이 등가로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한다.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 <중략> 작은 기쁨이 이룩해내는 엄청난 역할이 놀랍다. <중략> 슬픔이든 기쁨이든 우리의 모든 정서는 우리의 생명에 봉사하도록 이미 소임이 주어져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개인적 취향 통제 행태를 떠올려보기

아래 내용을 읽는데 책의 맥락보다는 내 개인의 맥락으로 해석했다.

법에 기초한 공권력이 개인적 취향을 물리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 맥락이 아니라 회사나 팀에서 갈등을 조정할 때, 위와 같은 현상을 대입해보았다. 물론, 내가 근래에 익혀서 선호하는 방식은 개취인정을 하면서 갈등을 해소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래와 같은 예시 등으로 인해 인용문장과 유사하게 개인적 취향이 통제되기도 한다.

상급자가 강압적인 언사로 개취를 포기하게 한다.

계약자 중 누군가가(흔히 '갑'이라 불리는 쪽 사람) 개인적 취향을 통제한다.

인사평가에서 개인적 취향이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아래 문장을 읽을 때, 주로 있는 사람들이 세금에 반감이 큰 현상도 함께 떠올랐다.

인류가 일찍이 맛보지 못한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계속 '무한경쟁'을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아직도 평화와 안정이 저 멀리 있음을 뜻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자본주의가 욕망 부풀리기를 동력으로 삼는다고 지적한 표현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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