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영회 습작 Jul 31. 2021

추론의 바탕을 제공하는 느낌

책과 대화하기 XXI

이 글은 <데카르트의 오류> 8장 신체표지 가설을 읽고 형광펜으로 줄친 내용과 대화하듯 쓴 글이다.


추론의 목적은 결정이다

직업상 거의 매일 추론을 할텐데 이렇게 생각해본 일은 없는 듯하다.

추론의 목적은 결정이며, 결정의 본질은 어떤 반응을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빠른 의사결정은 스타트업 대표의 의무라는 글도 쓰고, 주변 사람들에게 의사결정이 대표의 의무란 말을 수차례 하고 다닌터라 신경학 관점에서 현상을 설명한 글은 더욱 흥미롭다.


추론이 결정을 위한 것이고, 결정이 반응을 위한 것이라면 반응을 위해 기억 안에 존재하는 지식을 활용할 것이다.

기질적 표상 형태로 기억 안에 존재하는 지식은 비언어적이거나 언어적 형태로, 또한 실제적으로 동시에, 의식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기억은 기질적 표상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 이르면 반복해서 들은 <월말 김어준> 박문호박사님 강의가 상당한 배경지식으로 작용할 듯하다. 하지만, 이 책 자체를 강의에서 소개받은지라 비전문가가 강의 없이 책을 읽으면 어떨지 알 수는 없다.


복잡한 현실과 추론의 필요성

아래 구절은 분류를 위한 예시이지만, 현실 세계의 문제를 다뤘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다양한 시간에 걸쳐 가능한 장점과 단점 사이의 잠재된 갈등을 가지고 있다. 복합성과 불확실성이 너무도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있으므로 믿을만한 예측에 쉽게 도달하기는 어렵다. <중략> 최종 반응선택을 취하기 위해 당신은 추론을 적용시켜야 한다.

복합성과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수단으로 나에게 장착된 것이 모호한 표현이지만 '애자일' 이다. 나의 애자일에 대해 아직 엄밀한 정의를 하긴 어렵다. 박문호박사님 설명처럼 내가 애자일이라는 모호한 이미지(기질적 표상 형태와 같은 말일까?)에 해당 기억을 보관하고 활용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해도 두루뭉술한 내 애자일 이미지 중에 독자들이 감을 잡을 만한 설명을 해보면 대략 이렇다.

판단이 서지 않으면 일단 간단히 뭐라도 해본다. (XP의 아기발걸음 원칙과 유사)

작은 단계로 나눠서 피드백을 관찰/반영하며 앞으로 간다. (XP의 피드백 가치)

함께 하는 동료나 이해관계자와 의사소통을 중시한다. (XP의 의사소통 가치)

불확실한 결과에 집착하기 보다는 희망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역량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써보니 애자일에 기초하면 완전한 추론은 어려울 때, 설사 불완적하더라도 시의적절한 결정을 위해 경제적 추론을 내린다는 생각이 든다.


느낌은 결정을 위한 공통적 맥락

<월말 김어준> 박문호 박사님 강의 탓인지 아래 내용을 읽자마자 '공통적 맥락이 느낌인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공유한 신경생물학적 중심의 형태로 그것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적 맥락이 흐르고 있다

비록 인용한 문장 앞뒤에 바로 느낌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지는 않지만, 지난 글에서 인용했던 책의 앞 장에는 관련 있는 내용이 등장한다.

나는 정말로 느낌이 특권적 위치를 소유한 것으로 본다. <중략> 느낌은 신체와 풀릴 수 없도록 묶여 있기 때문에 느낌은 발생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출현했고, 또한 우리의 정신생활을 미묘하게 잠식하는 우선권을 유지한다. 

아래 내용을 보면 결정을 잘 하기 위해 맥락이 중요하고, 다시 말해서 느낌이 결정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영역 내에서 결정을 잘한다는 것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그 생물체가 생존에서나 삶의 질에서 궁극적으로 유리한 반응을 선택하는 것이다.


일에서의 합리성

아래 내용을 보면 우리는 마치 매일 곤경에 빠지는 듯하다.

당신 마음이 추론과정을 시작할 때 공백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마음은 당신이 직면하는 상황의 색조에 대한 반응으로 생산된 다양한 이미지들로 충만하며, 그 이미지들은 당신이 둘러보기에는 너무나 풍부한 구경거리 속으로 의식을 들여보냈다 내보냈다 한다. 더욱이 상기한 비유에서 당신은 우리가 거의 매일 직면하는 일종의 진퇴양난을 인삭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럴까? 일에서의 합리성이란 제목의 단락을 다룰 때, 저자는 비로소 책 제목에 등장하는 데카르트를 언급한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문구와는 매우 대조적인 내용을 기술한다.

합리론의 개념에서 중요한 일면은, 최상의 결과를 획득하기 위해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과정은 명백히 정열에 의해 방해받지 않는다.

합리론의 한계를 암시하는 내용이 뒤이어 등장한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중략> 두 가지 대안을 훨씬 능가하므로, 당신의 분석은 추론이 진행되면서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략> 최악의 경우에 당신은 계산의 샛길에서 길을 잃게 됨으로써 결정 자체를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

왜 그럴까? 저자는 바로 답을 제시한다.

비교를 하기 위해 참고할 필요가 있는 많은 이해득실의 장부를 기억 안에 보유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논리적 추론으로 검색되어야 하는데 <중략> 주의집중과 작업기억은 용량이 제한적이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은 일화가 떠오르고, 요즘 인공지능이 부상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듯도 느껴진다. 뒤이어 아래 인용문을 읽으면서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가 더 나은 점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생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는 종종 우리가 성취하길 원하는 목표에 적절하다고 맞춰놓은 시간 틀에 따라 몇 초 혹은 몇 분 안에 결정을 잘 내리며, 뇌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단지 순수한 이성을 뛰어넘는 굉장한 일을 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따라서 어떤 대안점 관점이 필요하다.

다음 글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욕망의 두 형태에 대한 대화 II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