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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Aug 01. 2021

신체표지 가설과 감정

책과 대화하기 XXII

앞선 글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신체표지 가설의 등장

드디어 신체 표지란 말의 기원이 등장한다.

좋지 못한 결과가 주어진 반응선택과 연관되어 불현듯 생각날 때 당신은 불쾌한 내장 느낌을 경험한다. 이 느낌은 몸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현상을 신체적somatic 상태라는 전문용어로 부른다('soma'는 그리스 말로 몸이란 뜻이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이미지를 '표시'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하나의 표지marker라는 말을 사용한다.

불쾌한 내장 경험이라? 그렇다. 나도 시간에 쫓길 때 불쾌한 내장 경험을 한 기억이 있다.

신체표지는 무엇을 성취하는가? 이것이 주어진 행동이 초래할 수 있는 부정적 결과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중략> 그 신호는 당신으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행위의 부정적 경과를 거절하고 다른 대안을 선택하도록 할 것이다.

저자는 신체표지가 이렇게 작동하는 이유는 결정 과정의 정확도와 효율 증가를 위한 목적이라 주장한다.

신체표지는 아마도 결정 과정의 정확도와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것 같다. <중략> 이러한 감정과 느낌은 학습을 통해, 예측되는 시나리오의 결과와 연결되어 왔다. 어떤 부정적인 신체표지가 어떤 특정한 장래 결과에 병렬해 있을 때, 그 조합은 하나의 경보 신호로 기능한다. 그 대신 긍정적 신체 부호가 병렬해 있을 때, 이는 하나의 장려 신호가 된다. 이것이 신체표지 가설의 핵심이다.

신체표지가 우리가 흔히 이성이라 불리는 것과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부연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신체표지는 우리를 위해 심사숙고하지 않는다. 신체표지는 어떤 선택(위험하거나 유익한)을 강조함으로써, 또는 후속적 고려에서 빠르게 선택을 배제함으로써 숙고에 협력하게 된다.


마음속의 합당한 가설

저자는 신체표지 이해를 위해 유용한 개념을 제시하기도 한다.

신체표지 설명은 '효과적인 개인적, 사회적 행동은 각 개인이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 합당한 '가설'을 형성해야만 나올 수 있다'는 개념과 비교될 수 있다.

반면, 신체표지는 위 개념과 달리 이성적으로 가설을 형성하지 않아도 신체에 만들어진다는 차이가 있다. 생물학적인 이유와 함께 사회가 형성한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질 것이다. 이는 이 장 마지막에 나오는 문단에서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생물학적 조절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치는 특정한 사회에서 생존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설계된 문화적 처방에 맞춰져 왔다. 우리의 뇌가 정상이며 건강한 문화 속에서 뇌가 성장했다면, 그 장치는 사회적 관습과 윤리에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아래 내용을 보면 마음속 합당한 가설이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긍정적인 신체표지는 훌륭한 미래 결말의 이미지로 촉발되는데, 이는 분명히 더 좋은 일에 선행하는 불유쾌함을 견디게 하는 잠재적 근간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고통을 동반하는 수술이나 조깅, 대학원, 의과대학 등을 받아들이겠는가? <중략> 이러한 평가는 즉각적인 고통과 미래의 보상, 즉 현재의 고통과 미래의 기쁨에 대해 적절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의지력은 '단기간의 결말보다는 장기간의 결말에 따라 선택한다'는 개념을 일컫는 또 하나의 이름일 뿐이다.

더불어 얼마 전 썼던 욕망 충족의 과정은 기쁨보다 고통이라는 표현과 관련 글도 떠오른다. 이 책은 뇌의 기전과 생리학적 접근이라면 이전 글은 욕망의 관점에서 관찰하기 기록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래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떠오르는 구절이다.

진실은 우리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믿고 느끼고 의도하도록 만드는 생리적 원인과 무관하다. 믿음과 느낌과 의도는 진실로 인간 생물체 안에, 또한 우리에게 젖어들어온 문화 안에 뿌리박은 여러 요인의 결과다.

아래 내용을 보면 인간만이 갖는 자유 혹은 자유의지가 떠오른다.

장대한 인간의 업적들은 생물학 혹은 문화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을 거부함으로써 달성된 것이다.


신체표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저자는 신체표지가 오염(?)되는 부분을 지적한다.

합리적 결정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신체표지는, 교육과 사회화의 과정에서 특정한 종류의 자극이 특정한 종류의 신체상태와 연관되어 우리의 뇌 안에서 창조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차적 감정의 과정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오염이라는 표현은 즉흥적으로 붙인 것인데, 문화에 의해 신체가 침투되는 비대칭스러운 현상을 강조하기 위해 선택했다. :)

생존을 성취하는 것은 불유쾌한 신체상태를 궁극적으로 감소시켜서 향상성, 즉 기능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생물적 상태를 얻는 것과 일치한다.

사회 혹은 인간 공동체에 의해 오염되기 전과 후에 위 문장에 대한 해석은 상당히 달라질 듯하다.

X라는 것을 선택하여 Y라는 나쁜 결과가 오게 되면, 벌과 이로 말미암은 고통스러운 신체상태가 따르게 된다. 신체표지 체계는 이러한 경험에 의해 유도된 표상을 습득한다.

<월말 김어준>에서 박문호 박사님은 인간이 살인자를 가두거나 심지어 사형에 처하는 일은 공동체의 안정을 파괴하는 강력한 수컷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인간 스스로 가축화(self-domestication)한 결과라고 설명했는데, 그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신체표지와 전전두피질(前前頭皮質)

앞선 내용 즉, 문화적 요인도 신체표지에서 같은 방법으로 취급하는 신경 조직망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신호가 바깥 세계에 관련된 지각에서 발생했거나, 바깥 세계에 대한 우리의 사고에서 발생했거나, 신체 고유의 사건에서 발생했거나 등에 상관없이 전전두부피질은 이러한 신호를 받는다.

여기서 뇌의 신체 부위가 등장한다. 책에는 전전두부피질이라 표현하지만, 구글링 해보니 전전두피질이란 표현이 널리 쓰인다.

이미지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A0%84%EC%A0%84%EB%91%90%ED%94%BC%EC%A7%88

아래의 내용을 읽다 보면 결정의 제1원칙은 생존에 유리한가 하는 질문인 듯하다.

전전두부피질은 인간 뇌의 몇몇 생-조절bio-regulatory 구역으로부터 신호를 받는다. <중략> 생존과 관련된 선천적 선호는 추론/의사결정의 본질적인 부분이 된다.

하지만, 생존의 위협이 매우 줄어든 현대 인간이 놓인 맥락의 과거와는 매우 달라졌다.

전전두부피질에 있는 수렴지대들은 적절히 범주화된 독특한 생활경험의 우연성을 담고 있는, 기질적 표상의 저장소다.

저장소의 내용에 따라 추론과 결정이 달라진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상태이기도 하고, 이를 개성이라 설명할 수 있다. 범주화란 표현을 보니 바로 <월말 김어준>의 박문호박사님 설명이 떠오른다. (여기까지 열심히 읽는 독자분이 있다면 꼭 들어보시기 바란다.) 범주화에 대한 박문호박사님 강의를 이해했다면 다음 내용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내가 당신에게 유대인의 결혼이나 가톨릭의 결혼에 관해 물으면, 당신은 범주화된 이미지들의 적절한 틀을 재구성하여 어떤 유형의 결혼을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신은 내게 당신이 결혼을 좋아하는지, 어떤 유형의 결혼을 가장 좋아하는지 등을 말할지도 모른다.


범주화된 우연성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문장이다.

범주화된 우연성들은 예측과 계획을 수립하는 데 필요한 미래 결과에 관한 풍부한 시나리오의 생산에 기본이 된다.

저자와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범주화된 우연성이란 표현이 묘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우연히 만나는 삶의 많은 순간을 다르게 범주화한다. 그에 따라 우리의 개성이 드러나고, 삶이 달라진다. 그리고, 인공지능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분들의 시각도 범주화된 우연성이란 표현을 들어 짐작해볼 수 있다.


개인의 일부여야 할 범주화된 우연성이 복제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인공지능이 주는 위협인지도 모르겠다.


명백하고 은밀한 신체표지

이 문단의 시작에서 인간에 대한 존경심을 거론한 이유는 꿀벌과 인간은 은밀한 신체표지의 기전 관점에서는 동일하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리리라. ;)

인간에 대한 마땅한 존경심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모든 종을 비교해 볼 때, 의식과 추론을 관장하는 뇌가 없는 생물체에서는 은밀한 기전들이 의사결정 장치의 핵심이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 은밀한 기전은 결과를 '예측'하는 수단이며,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하는 생물체의 행위 장치를 편향되게 하여 외부 관찰자에게는 하나의 선택으로 보이게 한다.


감정의 도움, 좋든 싫든

내가 전공도 아니고 본업과도 무관한 데다 난해하기까지 한 이러한 책을 인내심을 갖고 보는 이유를 굳이 찾는다면, 감정을 극복하라는 (직관적으로) 무지한 통념을 극복하고 싶은 욕구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많은 구절에 형광펜을 칠했다.

종종 감정과 느낌으로 표현되는 복종, 확신, 자존심을 보존하려는 욕망 등과 같은 생물학적 욕구에 의해서도 합리성의 실패를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한 도시를 자동차로 가는 것보다 비행기로 가는 경우 생존율이 더 높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확실함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동차보다 비행기를 더 두려워한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다. 인간의 편향을 이야기하는 곳은 매우 다양하니까 낯설지 않은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은 생물적 욕구와 감정이 의사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며, 실제적인 통계 사실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체에 기반을 둔 잘못된 '부정적' 영향 역시 생존 지향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하지만, 저자는 결론의 적절성을 떠나 신체표지는 생존 지향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아래 내용을 읽는데 진영 논리에 치우진 사람들의 정치적 판단에 대한 경험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생물학적 욕구와 감정이 어떤 상황에서 비합리성을 낳을 수 있다 할지라도 다른 어떤 면에서는 절대 필요하다. <중략> 자동화된 신체표지 기전이 사실과는 다른 명백한 편견을 만들어내, 어떤 경우에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하거나 작업기억 같이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기전을 방해하는 등 유해한 점이 있다고 해도 그렇다.

전전두피질에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합리적이지만,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병증을 설명하며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행동은 순수이성의 한계에 대한 좋은 예이다. 또한 자동화된 의사결정 기전을 갖지 못한 파국적 결과의 좋은 예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순수이성을 이해하기 위해 칸트를 읽을 생각은 없다. 저자가 칸트와 함께 앞서 기술한 플라톤, 데카르트를 저자가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볼 뿐이다. 도올노자 강의 초반부에 도올선생은 절대적 존재를 존재 양상과 구분하는 서양 철학의 한계를 강하게 비판했는데, 적어도 과학은 서양 철학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신체표지 설명 후반부는 조금 성격이 다른 내용이 등장한다.

지식 표현의 과정은 두 가지 조건이 만났을 때만 가능하다. 첫째로, 사람은 '기본적 주의집중basic attention' 기전을 끌어올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다른 것들을 상대적으로 배제하여 의식 내의 정신적 이미지를 유지하도록 해준다. <중략> 두 번째로, 사람은 '기본적 작업기억basic working memory' 기전을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전공과 직업적 배경 탓인지 '기본적 주의집중basic attention' 기전을 즉각적으로 CPU에 대응시키고, '기본적 작업기억basic working memory' 기전을 메모리에 대응시키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두뇌는 '폰 노이만 아키텍처가 어떻게 되더라?' 라는 질문도 하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후 내용도 컴퓨터 구성 맥락에서 읽혔다.

실제의 지식에서 생겨난 시나리오의 방대한 전망에 대한 추론 과정에는 세 가지 지지적 작동자player가 존재한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전으로, '자동화된 신체상태'와 '작업기억', 그리고 '주의집중'이다.

앞선 둘에서 빠진 구성요소는 바로 자동화된 신체상태이고, 이는 시스템의 상태 그 자체다. 우리 뇌의 기억에 해당하는 저장장치와 함께 외부 구성요소와 상호작용하여 획득한 결과의 총합의 바로 상태다. (이 글을 쓰는 시기에 시스템의 상태와 상태도 작성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니, 묘한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아래 문장은 컴퓨터 구성을 넘어서 프로그램과 우리의 사고 구조를 대입시키고 싶은 충동을 들게 했지만, 길을 잃을(?)까봐 멈춘다.

우리의 사고를 형성하는 이미지들은 '구절phrases'로 조직되어 있고, 이것은 제때에 차례로 '문장으로sententailly' 배열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편견이다

아래 문장을 보고, 도발적인 제목을 붙여봤다.

신체표지는 뇌가 이미지를 다루는 방법을 변경시켜 하나의 편견으로 작동한다.

편견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정서에 대한 도전이다. 사실 개성은 어떤 면에서는 편견의 총체라고 할 수도 있다. 편견이 없다면 사실 우리는 개인으로써 존재 가치가 없는 것 아닌가? 물론, 편견을 강조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편견을 있는 그대로 보고, 우리가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과학적 탐구 결과를 겸손하게 수용하자는 의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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