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대화하기 VIII
도올 선생과 책으로 만난 지 5년이 지난 지금에야 본격적으로 그분의 책으로 노자를 공부하려고 한다. 본격 공부 전에 일단 하던 대로 책과 대화하기로 먼저 만나보자.
계급혁명을 필요로 하는 사회구조가 사라지면 맑시즘은 무기력해지고 만다.
2021년의 대한민국에는 계급혁명이 필요 없을까? 지난 보궐선거에서 20대 남성의 70%가 국민의힘을 지지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 의견이 분분하고 맞추기도 어렵다. 다만, 이를 부동산과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예전에 대만에서 법인장을 지낸 후배가 대만에 가보니 대한민국은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희망은 있는 나라라고 말한 기억이 났다. 요는 일본과 대만은 이미 자기 돈으로 벌어서 집사는 일이 불가능하고, 한국만이 아직 희망이 있다는 주장이다.
날 때부터 집의 소유 가능 여부가 결정되는 상태를 계급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 그렇다. 취업뉴스에서 토지 공개념을 주제로 다루는 것을 보면, 확실히 맑시즘은 대한민국 부동산 문제에 대해서 2021년에 쓰임새가 있다.
21세기 중국공산주의는 전제적 당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산업주의 체제System일 뿐, 공산주의의 원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다.
2016년 북경에서 살고 북경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사실이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에서 내가 배운 공산주의와 중국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곳은 대한민국보다 훨씬 시장 친화적이었고, 노조란 조직 자체가 기업 친화적이고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이게 뭐지? 한국에서만 자란 사람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었다. 우리가 반대한 공산주의와 중국에서 부딪힌 현실과 관련성의 거의 제로였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 즉, 군사정부 때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집회를 하기 어려운 점도 그렇고, 계획경제적인 측면이 강한 점이 특히 그렇다. 다른 점은 군인 출신 정치인이 아니라 공산당 출신으로 지방 정치부터 두루 거친 이들이 중앙정부의 정권을 잡고 있다는 점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국가의 독립을 이끈 후손들이 바로 그 공산당 엘리트의 출발이란 점이다. 대한민국은 아직 군사적인 면에서는 미국의 작전 통제하에 놓인 점이 중국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이에 따라 독립을 이끈 세력이 대한민국의 주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 중국 체제와 우리 체제의 큰 차이다.
그림을 하나 넣으려고 노자 3장을 키워드로 검색해보니 아래 유튜브가 등장했다. 우연한 일이지만, 그래 노자 3장의 요약이 저것이라면 중국 공산당의 지향점과 비슷하긴 하다. 문제는 부쟁의 정신을 잃고 미국과 경쟁한다는 점에서는 3장과 거리가 먼 듯도 하다.
불상현不向賢의 현賢은 <중략> 지혜롭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의 우위를 점령케 하는 <중략> 지배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강자들을 지목하는 것이다.
나는 스타트업을 운영하면서 수평적 협업을 추구하면서 서로 이끌고 따르는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나 고민하곤 했다. 결국 사람 사이의 관계이니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과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 사회도 권위주의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반동의 조짐이 요즘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투를 꼬투리 잡으며 사회 변화에 거세게 저항하던 보수신문들은 고시 사회의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는 검찰총장을 공정의 아이콘으로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놓은 듯하다. 하지만, 시간문제일 뿐 과거로 돌아갈 일은 없다. 다만, 정말로 젊은 세대들이 윤석렬이 공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스스로의 학습 능력에 대해 심각하게 의문을 던져보기를 바란다.
고시가 점점 사라지는 판국에 필자가 고시 사회라고 칭하는 표현은 진짜 고시로 이뤄진 사회가 아니라 아래와 같은 현상을 담은 말이다.
오늘날 대학 입시병이나 스펙 운운하는 사회 병태가 이러한 가치 서열의 조작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필자는 고시 사회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미미한 일들이라 밝힐 만한 것은 아니다.
노자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이 두 마디에 있다: 부쟁不争! <중략> 노자의 정치철학은 근원적으로 쟁争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정치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故김대중, 故노무현 그리고 문재인이라는 세 명의 대통령을 존경한다. 그들 셋은 명백하게 평화를 지향하신 분들이다. 故박정희 대통령은 국가를 걱정한 분이지만, 군인인지라 평화를 지향하기 어려웠다. 나머지 대통령 모두는 사적인 감정이 앞선 국가 지도자로는 한참 모자란 멘털만 강한 정치 전문가 정도라고 평가한다. (정치 비전문가 입장에서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부쟁不争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잔인한 서울에 살면서 꿋꿋이 지킨 캐릭터이기도 하다. 나는 골목대장도 하기 싫었고, 학창 시절에도 빌어먹을 선의의 경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금도 경쟁은 해본 기억이 없다. 내가 노자를 배우는 이유는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서야 만나게 되는 운명인가 보다. ;)
이제야 비로소 내가 약한 부분이 나온다. 내가 노자를 배워야 하는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인간 생명의 중추가 배腹에 있고 마음에 있지 않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략> 오장육부의 관계로부터 발현되는 어떤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중략> 부차적인 것을 비워서 원초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충실케 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나는 확실히 실천보다는 전략과 계획을 세우는데 익숙했다. 심지어 중학교 때는 학습법만 공부하고 교과서는 안 읽었다. 독자들은 농담인 줄 알겠지만, 실제로 그랬다. ㅋㅋㅋ
그러다가 애자일(Agile)이라는 소프트웨어 개발 방법을 만나면서 인생이 바뀐다. 2008년 프로젝트에서 PM(프로젝트 관리자)를 맡으며 그간 책으로만 공부했던 애자일을 내 프로젝트에 적용하고, 제대로 마음고생을 했는데 지금까지 바로 그 애자일을 몸에 익히고 산다. 당시 마음고생을 개발자 커뮤니티에 발표한 흔적이 아직 구글에 남아 있다.
어떤 작전을 펼쳐봐야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면 말짱 꽝이라는 것이 바로 2008년 내가 배운 애자일이다. 도올선생의 3장 해설처럼 부차적인 것을 비워서 원초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충실케 하라는 요즘 내가 배우고 있는 애자일이기도 하다.
개념적 사유가 나에게 해롭다는 사실은 꽤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런데 어떻게 벗어나는지는 찾을 길이 없었다.
골은 피를 생산하는 공장과도 같은 것이며 인간 존재의 근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뼈대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중략> 지는 쓸데없는 개념적 지향성이며 번뇌의 주체인 심과 상응하는 것이다. <중략> 무지는 ignorance가 아니라 개념적 사유의 폐단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 때가 있나 보다. 그러다가 컨설팅 회사에서 결과 기준으로 가장 잘 나갈 때, 기회가 찾아왔다. 스스로 프로젝트의 성과에 대해 의심했고, 그만두고 원점에서 시작하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중국에 가서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나를 찾았다. 새로 찾은(?) 나는 어느 정도는 개념적 사유 밖의 능력 예를 들어, 개취 인정이나 기다림 등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되면, 내가 왜 지금에서야 노자를 읽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3장 해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도올선생은 나에게 아직 극복하지 못한 숙제에 대해 상기시켜 준다.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성당에 2년 남짓 열심히 다녔다. 코로나 19로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되었지만, 사실 내가 성당에 가는 이유는 종교가 아니라 온유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무지무욕이야말로 평화Peace의 원천이다. 평화는 지와 욕을 해탈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몇 년이나 걸릴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중국에서 동료들을 기다려 준 것처럼
그리고, 우리 회사 동료들을 성장을 기다리는 것처럼 똑같이 나에게도 기다려주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