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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ul 29. 2021

욕망의 두 형태에 대한 대화

책과 대화하기 XIX

이 글에는 본과 보기의 문화이론 4장 본보기와 욕망 충족, 그리고 문장놀이의 일부를 읽고 내가 느낀 생각을 기록한다.


욕망이라는 화두

자본주의 문화는 상품의 생산과 소비에 대한 '욕망 부풀리기'를 동력으로 삼고 있다.

여러분들의 동의하시는가? 나는 동의한다. 우리가 TV를 보거나 무료로 콘텐츠를 볼 때, 대가로 지불하는 시간으로 암묵적 합의가 있는 광고가 동의의 근거다. 광고는 욕망 부풀리기의 흔한 수단 아닌가? 지구촌 어딜가도 쉽게 볼 수 있는


뒤이에 인용하는 문장은 다소 불편한 표현이 있지만 충분히 동의할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나오는 모든 결핍을 상품의 생산과 소비로 해소하려는 물신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류가 최소한의 생존이라도 담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망을 이해하고 주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독 욕망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부진한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멋지다! 마음에 드는 표현이다.


자기 욕구를 인지하라는 요구를 하다

나는 스타트업 대표이사인데 작년 연봉협상 때, 한 직원에게 리더로 성장해야 한다며 연봉을 올려주는 조건으로 아래와 같은 요구를 했다.

자네는 정말 성실하고, 효과적으로 일을 잘 하는데 기계인간 같은 면이 있다. 리더는 사람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후에 8개월이 지나서 나는 그에게 욕구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그 해가 지나기 전에 그는 욕구를 드러내는 사람이 되었다.


내 주변 사람들 중에 MZ세대와 일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어보면, 자기 욕망(나는 욕구와 욕망을 구분하지 않고 쓴다)을 여과없이 드러낸다는 말을 한다. 나는 스무살때부터 그렇게 살았고, 적어도 나에게 그건 세대 문제가 아니다.


다만, 아래 내용을 읽으면서 개신교 교회를 다니는 젊은(나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90년대 젊은이들에게나 보일 구태적인 사고와 행동에 갇혀 있다고 느꼈던 경험이 떠올랐다.

자본주의 사회도 전통사회와 마찬가지로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두터운 장벽을 설정하고 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전혀 모르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자기 생각처럼 말하는 모습을 보고 말이다.


욕망의 두 형태

나는 뒤이어 욕망을 우아하게 둘로 나눈 표현을 보고 감탄한다.

인간은 특정한 문화 단위를 구성하고 있는 전체 집단이 '문화적 이상(cultural ideal)'으로 설정해 놓은 큰 욕망 속에서, 낱낱의 개체들이 '개인적 취향(individual inclination)'으로 형성해 놓은 작은 욕망을 바탕으로 삶을 꾸려간다.

정말 우아하다. 물론, 이런 대별을 들어본 적이 있긴 하다. '공사를 구분해라' 라는 식의 굉장히 폭력적인 언사를 적어도 10년이 훨씬 전에 누군가에게 듣기는 했었지만, 그때는 우아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정반대지. :)


또한, 개인적 취향이란 표현을 보자마자 나는 나의 개취인정 경험이 떠올랐다. 중국에 사는 4년 중에서 꼭 2년 동안 찐하게 배운 개취인정의 경험 말이다. 책의 표현을 활용하면 문화적 이상(cultural ideal)이 클라우드 서비스라는 제품 구현일 때, 중국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미국의 서비스를 개발 도구로 사용하여 중국 개발자들과 협업하려고 하는 한국 기획자의 나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인적 취향을 참아내고 인정하며 함께 목표를 향했던 2년의 여정이 나에겐 개취인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몸안에 기억되어 있다.


나는 중국말도 서툰 그가 낯선 환경에서 두려움과 외로움을 이기고 팀의 목표(혹은 문화적 이상)를 함께 추구하는 대가로 그가 동료들의 불편함을 야기하는 부분을 묵인해주기로 한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욕망의 두 형태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 있다.

문화적 이상은 공공의 세계로서 개체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중략> 개인적 취향으로 설정된 작은 욕망은 개체의 마음속에 형성되어 존재한다. <중략> 개인적 취향은 필요와 여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 이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생겨나고,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개인차가 발생한다.


본보기와 함께 살기

아래 문장을 쓴 저자의 의도와 다른 듯 하지만, 나는 모방하는 사람을 주체로 본보기를 떠올렸다.

인간은 문화적 이상으로 설정된 큰 욕망을 일반적으로 '본보기'라고 부른다.

나는 스스로가 나에게 본보기가 되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어깨 넘어로 많은 것을 배우고, 고마운 마음에 일곱 명의 사람들을 멘토라 여기고 있다. 그들은 나에게 '본보기'였고 지금도 그걸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부는 여전히 본보기이다.


근데 그 욕망이 문화적 이상으로 설정된 큰 욕망인지는 의문이다. 그의 행동에서 배우고 싶은 바를 추출해서 내 나름대로 삶에서 구현하는 혹은 행하는 일일 뿐이니까. 하지만, 나에겐 그러한 성장이 중요했고, 이를 위해서 나 자신의 개인적 취향을 억제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는 큰 욕망으로 볼 수도 있다. 작은 욕망이 개인적 취향이라는 사실에 반하고, 그걸 억제했으니까 적어도 내 안에서는 문화적 이상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때 문화단위는 나라고 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나는 이를 전파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하면서 밈(meme)처럼 번지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문화단위를 꼭 나라고 한정할 수 없다. 창발적으로 퍼져나가는 집단이 문화단위다.


중국에 가기 전까지는 그런 본보기를 중시했던 내 삶에서 중국살이 중에서 현지에서 본 다양성을 배우면서 나는 저자가 말한 개인차를 과거보다 존중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함께 살기 혹은 이웃하기 라는 표현으로 부르곤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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