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지난 글에 이어 존 버거의 <Ways of Seeing>의 1장을 읽고 영감을 주는 내용을 옮기고 그에 따르는 생각을 기록한다.
신비화라니, 놀라운 사고법과 표현 방식이 잔뜩 들어있는 문단이다.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과거를 신비화하는 데로 나아간다. 우리는 과거 속에 살지 않는다. 과거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했을 때 필요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종의 샘물과 같은 것이다.
과거를 샘물에 비유하다니... 경이롭다.
저자가 전형적인 신비화의 예로 설명하는 내용 일부다.
이른바 '미술 감상(art appreciation)' 이라는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그림으로써 모든 갈등과 분쟁의 골치 아픈 문제들은 사라지고, 우리에게 영원히 변함없는 '인간 조건'만 남는다.
알듯 말듯하다. 한편으로는 다시 지난 글에서 인용했던 김영식 님의 페이스북 글이 떠올라 비슷한 구절을 찾아보았다.
인류는 진리와 종교라는 미신으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겠다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신과 합일하거나 스스로 초인이 되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거의 대부분의 수행과 종교와 근대 이전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샤머니즘입니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므로 끊임없이 갈고닦아 상승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것입니다.
신비화와 미신을 일대일 대응으로 보면 미술을 진리와 종교 대용물로 쓴 격이다. 저자에 따르면, 둘 다 현재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정작 중요한 문제에서 더 멀어지는 것이다. 하기야 책의 저자는 바로 이 문제를 작심한 듯 회피하고 있다.
무엇을 회피하고 있을까?
남녀 이사들은 이미 명성도 다 잃고 자선단체의 도움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늙은 화가를 응시하고 있다. 한편 화가는 가난뱅이의 눈으로 남녀 이사들을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객관적으로 보려고 애쓰고 있다. 말하자면 가난뱅이의 눈으로 그들을 보는 방식을 뛰어넘으려 했음이 틀림없다.
저자가 말하는 신비화는 나에게 박완서 님의 꾸짖음을 떠오르게 한다.
신비화는 어떤 어휘들을 사용했느냐 하는 것과는 별 상관이 없다. 조금만 달리 보면 너무나 명백한 것을 쓸데없는 엉뚱한 설명으로 핵심을 흐려 놓는 데서 신비화는 비롯한다.
박완서 작가님이 오랜만에 신간을 내고 TV 독서 프로에 나왔는데, 평론가가 작품이 자전적 소설이라고 제단하고 작가에게 묻자, 박완서 님이 혼을 내듯이 '그런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말할 때의 인상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요즘 자신의 현재와 무관하게 세상의 일들을 가지고 진지하게 떠드는 사람들에게 쭉정이 밖에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라고 말할 때, '평론가의 언어'란 표현을 쓴다. 그 표현은 항상 박완서 작가님이 독자의 상상력을 앗아가는 평론가의 말버릇을 꾸짖는 장명에서 기인한다.
스스로도 '평론가의 언어'를 구사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다음 말은 너무나 매력적이다.
우리가 현재를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과거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데이터 드리븐과도 고스란히 연결이 된다. 특히, '직면(直面)과 현실 데이터' 단락은 관점이 다르긴 해도 매우 유사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과거의 미술을 본다. 말하자면 매우 다른 방식으로 본다는 얘기다.
(누군가 따라가서 옆에 서 있는 행동 말고는) 미술 감상을 해본 일이 없는 나에게는 철학적인 표현으로만 이해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앞서 인용한 '역사는 항상 현재와 과거 사이의 관계를 구성한다.'에 근거해 현재 상황에 맞춰 과거의 미술을 '샘물처럼' 감상하겠다고 짐작하는 정도랄까?
한편, 저자는 소련의 혁명적 영화감독이라는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의 글을 인용한다.
나는 하나의 눈이다. 하나의 기계적인 눈. 나, 기계는 단지 내가 볼 수 있는 방식으로만 세계를 너에게 보여 준다. <중략> 공간과 시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대로 우주의 어떠한 점과도 연결될 수 있다. 나의 길은 세계를 다시 새롭게 지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카메라를 통해 영상을 담아내는 일을 설명하는 듯도 하고, 철학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문장인 듯도 하다. 지난 글의 이미지 정의도 떠오른다.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의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 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숫자를 이용한 이미지 활용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래프와 시각화가 왜 그렇게 강력한지 짐작이 되기도 한다.
어디에도 친절한 은총알 따위는 없고 그림으로 만들어진 많은 데이터는 주관적으로 적힌다. <중략> 숫자로 표현된 상황이나 현상에서 빠르게 얻기 힘든 통찰을 훨씬 쉽게 얻는 데 잘 만들어진 그래프만큼 좋은 도구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