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Ways of Seeing>을 읽고 쓰기
<욕쟁이 예수>에서 저자인 박총 목사님이 언급했던 책인데, 어딘지 끌리는 느낌이 있어 사서 읽었다. 사진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등장해서 (사진 찍기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혀 없음) 어렵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기우였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과 내 스타일의 글 전개가 마음에 쏙 들었다.
우선 1장 내용 중에서 메모한 내용과 그에 대한 생각을 기록한다.
아이들의 배움 혹은 선사 시대의 배움을 떠올리는 문장이다.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마침 오늘 퇴근 후에 본 페이스북 글이 떠오른다. 가정교육에 대한 이야기다.
놀라운 인연인데 퇴근하는 길에 페북에서 선사 시대의 배움에 상응하는 글을 보기도 했다.
초기에 사용하게 된 단어들은 먹을 것이나 신변의 위험과 안전에 관한 아주 절실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눈앞에 없는 것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되었는데, 상상은 변형이 가능하므로 단어들에는 강한 염원이 담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는 행위가 말에 앞선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 준다.
이 문장은 나에게 욕망을 둘러싼 세계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평소 늘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 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데이터에 대해 빠져 있는 탓에 지표나 머니볼 같은 개념들이 한 가지 예시로 떠오른다. 물론, 책이 그런 내용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표나 머니볼은 '보는 것'을 바꿔서 '아는 것'을 바꾸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박문호 박사님께 들은 '믿음의 통계' 그리고 '마코프 블랭킷' 같은 개념이 떠오른다.
다행히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아내의 이야기를 통해 내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만 본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일종의 선택 행위다. 선택의 결과,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시야의 범위 안으로 끌어들인다.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지독할 정도(?)'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았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도 그랬고, 박문호 박사님에 따르면 사람들이 다 그렇다.
우리는 결코 한 가지 물건만 보지 않는다. 언제나 물건들과 우리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다.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이것도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둥그런 시야 안에 들어온 물건들을 훑어보며, 세계 속에 우리가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려 한다.
앞서 인용한 그림을 보면, '줏대와 잣대'란 표현이 있다. 우리는 명징하게 인식하지 못할 수 있지만, 저자에 따르면 우리의 눈이 움직일 때 뇌는 '줏대와 잣대'를 활용하는 것일 수 있다. 최봉영 선생님 표현에 따라 '차려서' 그렇게 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무의식 수준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하는 힘을 가진 자가 '임자'라고 하면, 우리 몸은 임자로 태어났는데 어떤 이유인지 '임자'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김영식 님의 페이스북 글을 재인용하면 '샤머니즘의 미신' 탓일 수 있다.
이러한 샤머니즘의 미신을 최초로 깨트린 사람이 고오타마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안티 샤머니즘입니다. 지금 여기를 가리켜서 언어 너머를 드러내었습니다. 지금 이대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므로 내일을 위하여 갈고닦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아와 연기입니다. 그는 모든 미신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6권을 읽을 때 '안정'을 미신이라고 할 때 받았던 느낌과 '샤머니즘'에 대한 설명은 놀랍도록 유사한 느낌은 전해준다. 그렇다면, 이 책은 혹시 나에게 '미신을 벗어나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까? 뜻밖의 소득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책값은 이미 치러졌다. 안 읽어보신 분들은 (자유를 위해) 모두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다소 난해한 듯도 하지만 매력적인 문단이다.
이미지는 재창조되었거나 재생산된 시각이다. 그것은 특정한 장소, 특정한 순간의 사물의 어떤 모습 또는 모습들을 본래의 장소 및 시간에서 따로 분리해 내 일정 기간 또는 몇 세기 후까지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하고 있다.
모든 이미지는 하나의 보는 방식을 구현했다면, 흔히들 '프레임'이라고 하는 말이 사실은 이미지와 비슷한 말인 듯하다.
사진가의 보는 방식은 주제 선택에 반영되어 있다. 화가의 보는 방식은 캔버스 또는 종이 위에 그가 그려 놓은 것에 의해 재구성된다. <중략> 이미지는 한때 무언가를 누군가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미술에 대해 무지하고, 사진 찍기도 배운 바 없는 나에게는 '누군가가'라는 부분이 놀라운 통찰로 느껴졌다. 마치 <대체 뭐가 문제야>를 처음 읽는 사람이 '누구들의 문제인가?'라는 말을 접할 때 놀라던 모습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한 이미지는 X라는 사람이 Y라는 대상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된다.
이미지를 함수f 로 정의하면 f('창작자 or 생산자', '창작물')과 같이 된다.
애초에는 1장에서 느낀 점을 하나의 글로 담으려고 했는데, 너무 많다. 9 ~ 13쪽 그리니까 불과 5쪽이 만들어 주는 생각이 이 정도니 글 하나에 담기는 무리다. 중간에 끓으려니 제목이 고민이네. 마지막 단락의 제목이 주제라 할 수 있겠다. 14쪽 이후는 다음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