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차리는 언어 사용법 6
<디지털 대전환기란 나에게 무엇인가?> 편에서 '줏대와 잣대'를 쓰면서 이에 대해 스스로 묻따풀을 처음 해봤다. 솔직히 이전에는 최봉영 선생님이 들려주신 '신기하지만 평소 잘 쓰지 않는 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단어를 쓰지 않았다고 해서 '줏대와 잣대'가 내 삶과 무관할 수는 없다. 브런치에만 '의사결정'이란 단어가 들어간 글을 44개나 썼다는 사실은 내가 '줏대와 잣대'를 잘 벼리려고 노력한 시간의 흔적이다.
매번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을 인용하는 수준에 머물던 것을 넘어서 '줏대와 잣대'에 대해 생각하고 기록을 해보기로 했다. 아는 바가 많지 않으니 구글링을 하여 이미 쓴 글과 대화하듯 풀어보자. 첫아기발걸음은 '줏대와 잣대'로 구글링 하고 첫 페이지 글을 훑어보는 일이다. (2023년 10월 29일에 다시 보니) 온라인 기록을 통해 타인과 묻고 따지기를 시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묻따풀 시작을 도울 첫 글은 건강마을제작소 박평문박사님의 글인데, 정갈하게 잘 쓴 글이다.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되는 잣대가 없으면
외부의 작은 자극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줏대 없는 사람이 된다.
줏대 있는 나를 위하여
잣대에 대해 생각하는 하루를 보낸다.
이 단락을 읽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쓴 글인 <빠른 의사결정은 스타트업 대표의 의무>가 생각난다. 스타트업 CEO라는 낯선 일을 시작하면서 실무자가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덜 되었다 느껴도 당장의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마침 오늘 아침에 페북으로 공유한 글이 도움이 될 듯하다. 대표가 결정을 내려주어야 비로소 실무자가 책임감이라는 압박에서 벗어나 최선을 다할 수 있다.
이렇게 연관된 생각을 끄집어내어 보니 아래 문장은 훨씬 더 공감이 간다.
잣대는 줏대 있는 나를 지키는 기준이다.
그 기준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켜가는 것이다.
기준이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다면
조삼모사, 변덕쟁이와 다를 바 없다.
줏대와 잣대는 세우고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관계의 신뢰로 이어진다. 협업의 기초는 신뢰다.
스스로 세우고 지키는 잣대는
한마디로 신뢰의 문제다.
아래 문장은 지난 시간의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한 글이다. 새로운 일(CEO)을 맡아 버거운 날들이 많았지만, 약속한 바를 지켜왔다. 그렇게 표현한 일은 없지만 줏대를 지켜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뢰의 과정은 역경과 난관이 있다.
신뢰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다.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음은
인지상정이다.
어제 지인에게 내 자신감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그 자신감은 지금 보니 '줏대를 지켜온 다 년간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다.
두 번째로 읽은 글은 산사의 새벽 블로그 글이다. 인상 깊은 구절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소신을 가지고 줏대 있게 살아 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심층 정보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 일입니다. 왜곡된 정보, 편향된 정보, 가공된 정보로는 제대로 된 판단을 기대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런 상황에서의 줏대는 오만과 편견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내가 직전 쓴 글 <정보홍수시대에 문해력은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 편이 생각났다. 그리고 두 번째 구절은
"진정한 프로는 자신의 일에 세상의 잣대를 대지 않는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스스로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힘.
바로 그런 힘에서 나오는 잣대로 나를 다스리고 상대를 다스려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의 잣대를 가지려고 노력해 왔다. 잣대가 없을 때는 믿을 만한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고, 책임은 내가 졌다. 책임을 잣대를 제공한 사람에게 돌리면 마음속에 변명이나 원망과 같은 고통만 쌓을 뿐이다.
구글링 첫 페이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라 다음 페이지 글도 찾아보았다. 뒤이어 읽은 글인 카톨릭신문의 신념과 확신이라는 칼럼이다.
‘줏대’라 하면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일컫는다. 또 “자기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을 일러 말하기도 한다.
나는 사물이 아니고, 줏대를 육체에 대입하여 바라볼 일은 아니다. 그러니 말로 빚은 생각이 만들어내는 줏대라고 해야 할 터이다. 그렇지만, 생각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다시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을 소환했다.
앞서 <빠른 의사결정은 스타트업 대표의 의무>라고 강조했던 잣대로 묻따풀해보자. 나는 나름의 줏대 즉, 임자의 줏대로 말, 생각을 해서 욕망을 표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생각이 말로 전달된다. 실무자는 내 말을 듣고 생각을 하여 일종의 사회체제인 회사의 잣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자신의 욕망을 회사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펼쳐나가고, 생각이 아닌 실상의 세계인 자연세계에 변화를 가한다.
이런 행위가 반복되면 상대방은 임자로서 나를 바라보는 잣대가 생긴다. 그때 “자기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이 느껴지면, 그걸 자기 생각에 의거한 나의 줏대로 여긴다. 만일, 그게 없으면 나를 줏대 없는 사람으로 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나의 줏대가 필요할 때,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신뢰를 잃어 함께 사회 체제를 차릴 수 없다. 반대로 기업과 같이 사회 체제를 꾸리려면 신뢰가 필요하고, 줏대 있는 사람들이 기업의 잣대를 분명하게 해서 기업의 줏대를 만들어야 한다.
어제 만난 지인이 요즘 사람들이 화가 많이 나 있는 것 같다면서 주범으로 대통령을 꼽았다. 대화를 돌아보면 국민 다수가 잘못된 잣대로 대통령을 뽑은 일이라 믿고 있었다. 칼럼에 이를 상기시키는 문장이 있다.
유권자의 입장에서도 줏대는 요구된다. 과거처럼 지역색이나 이념 논쟁은 큰 변수가 되지 않고 있다. 산만하기 그지없는 후보자들의 난립에 유권자들은 그저 혼란스럽다. 맘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또다시 <정보홍수시대에 문해력은 어떻게 갖출 수 있는가?> 편이 생각났다.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라떼'는 매우 심각한 편향을 낳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과거부터 지켜온 방식이 정말 '줏대와 잣대'를 갖고 해왔는가 돌아봐야 한다.
나라는 우물에 갇혀서 상대를 판단하면, 놀랍게도 가족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비난을 하기 쉽다. 그걸 벗어나 있는 그대로 현실을 볼 수 있다면 다른 것이 보인다.
나에게 이런 태도를 심어주는데 영향을 준 사건이 여럿 있다. 그런데 직관과 행동을 넘어 말과 생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만난 책 중에 하나가 <팩트풀니스>이다. 낯선 일을 만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반직관을 수용하고 현실을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게 바로 사실충실성(Factfulness)이다. 그 후에야 비로소 유효한 줏대와 잣대를 갖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