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봉영 선생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페북으로만 아는 김양욱 선생님과 (나도 좋아하는) 박문호 박사님 강의 내용으로 두 분이 토론을 하시다가 내가 떠올랐다며, 직접 그린 메모(그림)를 보내주셨다.
안 그래도 최선생님께서 설명하신 스물여덟 개의 바탕 낱말을 훑어보기 시작한 터인데, (독학보다는) 먼저 던져 주신 주제를 묻고 따져 보기로 한다.
이 글의 배경에는 <월말김어준>의 박문호 박사님 강의 <미래에 중독된 종, 인간> 편이 있다. 강의에서 박문호 박사님은 우리 뇌의 특징을 한 마디로 함축하는 아름다운 표현이 제시한다.
인간은 미래에 중독된 종이다
최선생님의 메모 중에서 이와 연결되는 내용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미리 들어감'이라는 표현과 '예비적 행위'가 그것이다.
두 분 즉, 박문호 박사님과 최봉영 선생님은 각각 다른 맥락에서 하신 말씀이지만, 인간이 대체로 당면한 행위보다 예비적 행위에 중독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까?
내가 (박문호 박사님의 강의를) 이해하기에는 우리가 기억을 꺼내는 현재 시점에서는 과거를 다룬 기억이지만, 미래를 대비하는 용도로 끄집어낸다. 기억의 효용성은 현재의 행위에 달려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생각으로 아래 부분을 보자.
최봉영 선생님에 따르면
사람은 이미 일어난 어떤 일을 느끼고 아는 일을 한다
이를 현재 시점의 행위라고 보자. 그 일을 최선생님은 다시 크게 둘로 나눴다. 당면한 일을 해결하는 현재에 충실한 행위와 장래를 예비하는 행위이다.
이 대별은 또다시 박문호 박사님 강의 내용을 연상시킨다. 박문호 박사님에 따르면 날파리와 뱀의 운동은 인간보다 정확하다. 이는 5억 년을 이어온 '운동 루프'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의 정확성은 바로 생명 유지라는 절체절명의 목적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은 그 어떤 동물보다 유연하다. 어쩌면 그 유연성이라는 것은 언어로 빚은 허구(<사피엔스>의 표현)가 원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선생님의 행위 구분에서 예비적 행위는 바로 그 유연성을 높인다.
사실 내가 두 분의 가르침을 바로 흡수할 수 있는 배경에서 2019년 충격 속에서 읽은 <사피엔스>가 있다. 당시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으며 나는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고, 그 두꺼운 책을 지루한 줄 모르고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게 읽어 나갔다.
어떤 면에서는 박문호 박사님 강의의 상당 부분을 <사피엔스> 소화에 쓰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를 들어 언어가 상징으로 인간의 소통 능력을 자유롭게 한 부분이 얼마나 인류에게 큰 역할을 미쳤는지 알기 위해서는 박문호 박사님 강의 이전에 반드시 <사피엔스> 이해가 필요했다. [1]
최선생님 메모에는 사람이 갖는 필연이 하나 등장한다. 어떤 일은 언제나 현재 일어나지만 우리가 느끼고 아는 것은 늦게 일어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겪고 나서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최선생님은 이렇게 부연했다.
다시 박문호 박사님의 강의에 따르면, 우리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아무리 고등동물이라고 해도) 생명을 지키는 활동을 우선시한다. 그리고, '접근과 회피'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진화한 인류에게 여전히 유효한 듯하다. 몸에 이로우면 접근하고, 해로우면 회피하는 일이 기억과 느낌에 의존해서도 펼쳐진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우리의 숙명은 겪고 나서 알고 느끼기 이전에 당면한 일을 다뤄야 한다. 대부분은 생명에 직접 지장이 없는 일이기에 그 과정에서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무엇인가 드러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문제(의식), 가치관, 세계관, 믿음 등이 이러한 시간 차이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설명하는데 유용한 개념 들일 듯하다.
내 브런치를 검색해보면 적어도 작년 5월부터 최봉영 선생님과 간헐적인 교류를 이어왔다. 그 이유가 분명치는 않다. 하지만, 선생님께 배운 내용 중에 가장 선명한 하나를 꼽을 하면 바로 정신을 차린다는 말에 쓰이는 차린다와 살림과 회사를 차린다는 말의 '차리다'가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방금 내가 다룬 그 시차(일의 벌어짐과 느낌과 앎이 뒤 따르는)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정신을 차려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사태를 잘 차려가기 위함이 아닐까 하고 추정해본다. 맥락을 이해하고 사태를 파악하여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줏대와 잣대가 쓰이고, 또 동시에 줏대와 잣대가 바로 서는 것이 아닐까?
주말에 아이가 아인슈타인의 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을 누군가 아이에게 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박하는 말을 내놓으면서 설익었지만 미래에 대한 중독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말을 했다.
아빠 생각에는 우리는 다음 행동을 하기 위해 미래를 예비하는 뇌를 가졌는데, 현재에 집중하지 않고 너무 생각에만 빠지면 걱정에 빠져들어 뇌를 낭비할 수 있어. 아마 두뇌를 걱정에 쓰지 않고 현재의 문제를 푸는데 쓰면 아인슈타인처럼 뇌를 쓸 수 있을 거야.
[1] 주의할 점은 객관적인 경로가 아니라 지극히 내 경험의 축적 과정에 대한 설명이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