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차리는 언어 사용법 3
나는 <욕망을 둘러싼 세계 - 욕망 탐구IV> 편 이후부터 빈번하게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을 인용해왔지만, 스스로 풀어보려는 시도는 굳이 하지 않았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기에 그랬기도 하고, 의미를 덧붙일만한 추가적인 깨침이 있지도 않아서였다.
그런데 페북에서 읽은 시골 농부 김영식 님이 쓰신 글 <권위에 대하여>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어 보관해두고 여러 차례 보다가 최 선생님의 그림과 엮어서 글로 쓰고 싶은 내용이 생겼습니다.
시골 농부님의 아래 문장에서 시작을 해보죠.
지구에서 생명체가 진화한 과정의 끝에 인류의 뇌에서 언어가 창발 되며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의식입니다.
습관적으로 위키피디아를 찾거나 구글링을 하고 싶어 지지만, 이를 억누르고 앞서 제시한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 전체가 의식을 다루고 있다고 가정해봅니다. 주장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위 그림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같을 수 없지만, 시골 농부님 페북 내용 일부를 다시 인용합니다.
현대에는 의무교육만 충실하게 받아도 의식의 본질을 알게 되므로
교과서만 대략 이해해도 의식의 본질 정도는 안다고 가정해보죠.
이렇게 하면, 제가 직업 생활에서 빠르게 학습하고 써먹는 비법으로 훈련해온 아기 발걸음을 설명하기 쉽게 됩니다.
저는 아기 발걸음이라는 표현을 XP라는 책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지식이나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고 사용하는 법으로 발전시켜 왔기에 제가 말하는 '아기 발걸음'이 오리지널과는 의미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아기 발걸음 실천의 핵심은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 편에서 인용했던 시골 농부님 기개에 대한 설명이나 동료가 붙여준 상징적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 자란 새끼 새가 둥지에서 뛰어내리지 않으면 날개가 펴지지 않는다. <중략>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둥지 밖으로 과감히 몸을 던졌을 때 비로소 날개는 저절로 펴져 온몸을 허공에 띄운다.
지금까지의 설명이 다소 '용기'를 강조하거나 정서적 느낌만 강조할 수 있어서 다른 측면으로 설명을 더해보죠. 제가 아기 발걸음을 마음에 들어 할 때, 저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아래와 같은 구호로 일상에 임하곤 했습니다.
당장의 행복이나 즉각적 효과를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자
모호한 필요성에 입각해서 했던 일들이 의외의 결과를 낳는 일을 반복해서 집약적으로 겪으면서 깨달은 일종의 좌절이 있었습니다. 좌절은 새로운 배움이 길을 열어 주었는데, 뭔가 새로운 기술을 얻기 위해 한참 공부하던 습관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일단, 그냥 해보는 것이죠.
몇 번의 경험이 자신감을 심어주면서 타이슨의 경구를 제 삶의 교훈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접할 때 필연적으로 만나는 처음의 어색함, 긴장, 어설픔 등은 (타이슨에 따르면) 한 방에 훅 가지 않기 위해 잽부터 맞아보는 식의 행동 양식처럼 느껴졌습니다.
한때 2년 가까이 직장에서 아주 가깝게 지냈던 분이 저에게 용기 있는 사람이라며 추켜주는 일이 있었는데, 부끄러운 와중에도 '왜 저런 반응까지 보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났습니다.
추정하건대 그분은 제가 하는 행동을 자신에 대입하여, 본인은 행동하지 못하는 일을 제가 하는 듯이 보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제 내면을 보지 못한 해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무모한 도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분명 잽을 한 대 맞겠다는 것이지 그 이상의 대단한 용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석해보니 경제적 행위가 (결과적으로) 용기를 키워주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제가 <계획은 개나 주자> 편에 쓴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작전 수행 결과입니다. 저는 이상적인 사람이지만, 늘 이상 자체보다는 그 실현에 무게추를 싣고 있습니다.
아기 발걸음 설명에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다시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즉흥적으로 받은 느낌을 그림에 덧칠하고 이름을 붙여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아기 발걸음으로 저에게조차 큰 가치가 있는 그림은 아닙니다. (최봉영 선생님의 오리지널 위에) 찰나의 느낌을 포획한 그림이자 낙서일 뿐입니다.
하지만, 제 삶에서 다른 아기 발걸음이 그랬듯이 정성을 들이고 시간을 써서 행동하면 늘 결과가 삶의 일부로 따라왔습니다. 또한, 모호한 가운데에서 한 발을 떼었던 <미래에 중독된 인간의 두 가지 행동 양식> 편에서 붙인 최봉영 선생님과 교류하는 의미인 '정신을 차리고 현재를 차리다'다 두 번째 글을 맞이 하면서 <나를 차리는 언어 사용법>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아기 발걸음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글 역시 아기 발걸음이 되어서 저에게는 차리는 솜씨를 키워주고 독자분들께서도 불필요한 권위나 권위주의의 압제에서 벗어나 의식의 자유로움을 누리시는데 기여하길 빌어봅니다. 시골 농부님의 글이 파만이 되어 제가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된 이유가 아래 문장에 드러나네요. :)
진리를 보여주기 위하여 권위로 억압하거나 진리를 배우기 위하여 권위에 복종하는 오래 전의 방법을 이제는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든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