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종교인으로 읽은 <욕쟁이 예수> 7
이 글은 지난 글에 이어 <욕쟁이 예수> 중에서 '원조복음집 예수'와 '반골 예수', '세속 국가주의자 예수', '스님과 함께 일하는 예수' 내용 중에서 밑줄 친 내용을 기준으로 메시지를 도출하고 생각을 덧붙인 글이다.
아침에 페벗님이 올려서 본 기사에는 천안에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수상을 세우기로 했다는 소식이 보였다.
예수가 바란 회개는 제국이 유포하는 가치와 결별하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돌아서는 삶의 방식의 회개이며, 삶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 나라 가치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제국을 꿈꾸는 이들이 유포하는 가치관의 표상이 되어 무지의 표상으로 후대에 남을 듯하다. 거대한 불상을 지었던 인류의 습성(?)은 지금도 반복되는데 반해서, 예나 지금이나 '삶의 방식으로서의 회심conversion as a way of life'는 쉽지 않은 듯하다.
<반골 예수>장에 붙은 부제다. 최근 회사에서 가장 나이 어린 동료가 <프레임>을 다루는 책을 산 일이 떠올랐다. 그녀가 그 책을 계기로 'Don't Play the Game by Their Rules'하는 이치를 깨닫기를 빈다.
오늘날 우리 삶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우리 안의 제국적 생활방식-작게는 많이 벌어 많이 쓰는 걸로 사람을 줄 세우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GNP와 국방력으로 나라를 줄 세우는 것까지-을 회개하고, 대조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돌이키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삶의 방식으로 보자면 정말 지구가 단 하나의 제국인 듯하다. 잠시나마 절망감까지 느낄 정도다.
아래 문장을 보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6권에서 안정을 미신으로 설명해서 충격을 받았던 일이 기억난다.
우리 인간은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로 안정감a sense of security에 집착하다 못해 그것을 우상으로 삼기까지 한다. <중략> 대신 하나님을 의뢰하며 어디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내디딘 그 불안정한 걸음을 자신들의 궁극적인 안정감으로 삼는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를 낭비하는 일은 비단 성경뿐 아니라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XP 그리고 최근에 읽은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에서조차 다뤄지고 있다.
나는 상류층이 되려는 욕심을 버렸을까? 우리 아이의 교육 수준을 염두에 두는 행위를 보면 완전히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상류층이 되려는 욕망을 개나 줘 버리고 참으로 욕망할 만한 가치에다 인생을 베팅하고 신나게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우리는 지배적인 삶의 방식에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고, 또한 맹목적으로 거듭해서 연못으로 돌진하는 이웃에게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 줄 수 있다.
더구나 가족을 꾸린 상황에서는 단순히 내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닌 설득을 포함하는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실천 가능한 대안을 사는 중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중략> 내가 왜 이 세상이 유형화해 놓은 욕망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종교개혁은 서구의 역사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신교는 구원의 근거를 교회의 권위에서 개인의 믿음으로 옮겨 놓았다.
나는 중요할 때는 기복신앙정도로 여기다가 가끔 뭔가 따르고 싶은 글을 읽을 때만 종교인다워지는 지인들을 자주 목격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외래 종교가 그 땅에서 겪은 시행착오를 우리도 나름의 방식으로 겪어야 하는 듯하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저자가 목사님이신지라 더욱 귄위가 실리는 말씀이다.
내 단언하건대, 대한민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닌 세속 국가로 남아야 한다.
'종교'와 '신앙'을 구분하려는 태도의 근거를 저자가 설명해 준 듯한 글이다.
"저는 무교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특정 종교에 속해 있지 않을 뿐이지, 돈이든 빽이든 자기 능력이든 아니면 될 대로 돼라 식의 운명이든 무언가를 '믿고' '신앙'한다. 말하자면 종교통계학적으로만 무교일 뿐이지, 종교심리학적으로는 전혀 무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