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모래사장에서 노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문득 두 아이가 노는 방식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에 눈을 뜹니다.
물론, 그걸 이제 알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아마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도 개별적인 존재이고, 그에 맞게 대우해줘야 한다는 각성인 듯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두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북경에서 일할 때 비효율을 유발하는 습성을 갖고 있는 동료 때문에 다른 동료들이 힘들다고 따로 찾아왔습니다. 안타깝지만 그를 포용하지 않으면 이탈할 듯했고, 대안도 없어 저는 일의 결과에 대해서만 따져 물었습니다. 당시에 저의 태도 설정에 '개취 인정'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비효율적인 행동에 개선이 보이지 않으면 불편함을 느끼기는 했습니다. 이후에 자연스럽게 개인 취향을 받아들이는 데에 꽤 긴 기간이 필요했는데, 그 후로 저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고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 사회의 전체주의적인 윤리 교육의 영향은 꽤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직업상 Best Practices 같은 패턴을 매우 중요시하던 습성이 저에게 미친 영향이 꽤 깊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두 번째 사건은 아내가 나에게 '왜 아이에게 큰 소리로 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느냐?'라고 내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 준 사건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어릴 때 겪은 대로 돌려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이의 행동이 딱히 제지받을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내 주변의 어른들도 비슷한 식으로 조언을 하곤 했습니다. 이를 생각 없이 수용한 것이고 잘못된 '따라 하기'였습니다. 그 후 몇 년이 흐른 뒤에 저는 육아에 대해 나름의 가치관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육아가 무엇인지 나는 정의할 수 없다. 다만, 아직 어린 두 아이와 마주할 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이들과의 관계를 잘 차려가는 ‘육아’를 실천한다.
이 두 사건을 결합하면 첫 아이가 태어날 때 제 인식 수준과 대략 8년 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아무튼 저는 아이도 저와 같은 개별적인 존재란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이의 행동 자체를 바로 판단하여 '훈육'이라는 이름의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기존의 행동 패턴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사진의 장면도 '저 아이는 저렇구나'라며 그가 보여주는 행동을 보고 개성을 파악하고 있던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눈을 떴다'는 표현을 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최근에 다른 사람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일이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임을 깊이 배우고 있습니다. 10 년쯤 전에 ‘경청’에 대해 각성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충격적인 각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은 아직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도리어 포기하지 않고 10년을 끌어온 데에 스스로를 칭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 버텨 얻은 선물은 <당신이 옳다>를 손에 잡고 있는 현재입니다. 두 번째 읽고 있고, 올해 한 번 더 읽을 생각인데, 이 책 덕분에 사람의 존재는 빙산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섣부르게 판단하고 재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의 행동이나 말의 내용을 판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화를 할 때, 존경하는 저자의 가르침처럼 '감정은 항상 옳다'는 사실부터 알고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존중'의 시작인 듯도 합니다. (아직 배우는 단계라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해서 읽으세요.)
비유하자면, 멀리서 우리 아이를 바라볼 때 저는 두 개의 커다란 빙산의 일각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몇 시간이고 앉아서 모래성을 쌓는 일을 좋아하는 큰 아이라는 존재와 물만 보면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둘째의 존재를 마음에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저의 내면에 사랑이 채워지는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내면의 작용을 쭉 훑어보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