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7
치유란 속마음을 보호하는 동시에 농이 가득 찬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멋진 문장이지만, 경험으로는 무엇인지 모른다.
2019년에 시작하고, 두 번째 읽는 지금에서야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다.
존재 자체에 집중하고 주목하면 벽을 더듬던 손이 문을 만난다. 존재 자체가 속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존재에 주목하고 집중할 때 문이 반응한다. <중략> 문이 존재자체라면 문고리는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이다. <중략> 존재의 감정이나 느낌에 정확하게 눈을 포개고 공감할 때 사람의 속마음은 결정적으로 열린다. 공감은 그 문고리를 돌리는 힘이다.
'왜 이렇게 마음을 열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일이 자주 있다. 행동 가능한 함수로 바꿔보면 아래와 같을 듯하다.
지금 상대의 감정이나 느낌에 집중하라
그때부터 그의 말은 속도가 느려지고 어눌해졌다. 나는 그에게 지금 당신의 말이 느려지고 버벅대는 게 느껴지냐고 물었다. 진짜 자기 말이 나와서 그런 거라고 얘기해 줬다. 가성이 아니라 자기 육성이 처음 나와서 어색해서 그러는 거라고.
읽는 그대로 감동적이다.
아이는 아빠에게 "아빠 사랑해, 아빠랑 놀고 싶어, 우리 아빠가 제일 힘세"라는 식으로 아빠라는 존재 자체에만 반응하는 존재다. 아빠의 연봉이 얼마인지, 아빠의 키가 큰지 작은지 상관하지 않는다.
육아에 대해서 글을 쓸 때 정리한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아이들이 그러한지 알고자 하지 않았고, 내가 받은 그대로 무심코 행동하던 습관을 이겨낸 부분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알려준 아내에게는 떠올릴 때마다 고맙다.
그리고 두 아이에게 그런 느낌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자기 존재와 그 느낌을 만나고 공감받은 사람은 특별한 가르침이 없어도 자신에게 필요한 깨달음과 길을 알아서 찾게 된다. 그것이 정확한 공감의 놀라운 힘이다.
이제는 육아 경험을 응용해서 어른들에게도 공감을 훈련할 때다.
'심리적 조망권'이라니 정말로 정교한 표현이다.
친구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친구를 유일하고도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하기보다 '심한 가정 폭력을 당한 사람 일반'의 범주에 넣어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나를 포함해 우리 주변에는 아무 인식 없이 온통 이러는 행동에 싸여 있는 듯도 하다. 빨리 깨어나자.
자신과 자기 상황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을 때까지 묻고 공감하고 또 공감해 주는 일을 반복해 주는 것이 옆에 있는 공감자가 해야 할 일이다. <중략> 그 과정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등 엉뚱하게 해석하면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다시 묻고 들어주고 또 그 마음을 공감해 주면서 함께 가는 사람이 공감자다.
자신 없지만, 이제 초보 공감자로 아기 발걸음을 떼자.
아침에 장모님과의 통화 때문에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감정이 대비되는 이 문장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바로 오늘 실천해볼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겼다.
현재의 감정이 공감받지 못하면 과거의 상처를 꺼낼 수 없다. 지금 여기의 감정이 공감받지 못하면 그다음 이야기로 넘어갈 힘이 생기지 않는다. 어렵게 꺼낸 친구의 말머리가 의미 있는 그의 속마음 이야기로 연결되려면 친구의 현재 감정이 공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첫 줄부터 내가 다른 사람 마음을 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드러난다. :)
내 존재를 조건 없이 그대로 다 수용해 주는 그런 사람이란 것이다. 그런 사람을 만났다는 느낌이 들어야 사람은 비로소 안전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래야 자기 상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자기 불안을 내려놓고 더 깊은 자기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다.
나 스스로 썼던 글인 <소프트웨어 기능과 구조에 대한 이야기> 편의 글귀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함께 일하는 사람이 예측이 되지 않으면 두려움을 느끼거나 나아가 비판적이 되는 현상이다. <월말김어준>과 박문호 박사님 덕분에 뇌과학에 대해 1년 정도 듣는 정도로도 왜 그런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안을 피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 그래서, 환경이 아무리 안전하게 바뀌어도 새로운 일을 대할 때 무조건적으로 상당한 위협을 뇌에서 느끼는 듯하다.
조직의 변화라는 익숙한 맥락에서는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한 존재를 공감할 때는 떠올려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잘했든 자신에게 야박했든 '너는 그러고 있었구나, 그랬었구나' 스스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조망할 수 있도록 그의 앞에 선 거울인 양 나는 그를 계속 비추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