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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Dec 04. 2022

존재 증명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고통에 공감하기

<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3

여러 사람을 떠올리며 거듭 반성하게 하는 문장이다.

비상한 머리, 출중한 외모가 없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정성을 외우는 일에 그치지 말고, 하루 한 번이라도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장치를 만들자.


자기를 드러내려는 사람을 보면

역시 또 반성하게 된다.

'자기'를 드러내면, 그러니까 내 감정, 내 말, 내 생각을 드러내면 바로 싹이 잘리거나 내내 그림자 취급만 당하고 사는 삶은 배터리가 3퍼센트쯤 남은 방전 직전의 휴대전화와 비슷하다.

나는 그들의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대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행동 변화가 필요하다.

내 존재가 희미하게 사라져 가고 있다고 느끼면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 심지어는 폭력적 행동도 불사한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끔찍한 말과 행동을 화살처럼 퍼붓던 일베 회원들 몇 명을 붙잡고 보니 고립된 처지의 유약하고 위축된 개인들이었다. 일상에선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허약한 존재들이었다.

느닷없는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고민했던 우리 회사 동료에게도 이 내용을 알려줘야겠다.


진단의 휴지통이 되어가는 우울증

나는 대체로 낙천적이지만, 수년 전에는 잠시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래 문단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알 듯하다.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나 자살 시도를 한 사람도 우울증, 사람을 1명 죽인 사람이나 150명을 죽인 사람도 쉽게 다 똑같은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중략> 표면적인 증상만 같으면 같은 질병이다.

저자에 따르면 정신 질환에 대한 미국 표준 진단체계인 DSM-5에 의한 기준으로는 아프리카 오지가 아닌 현대 사회에 산다면 거의 모두가 우울증 진단을 받을 수 있다.

거의 체크 리스트 의학이 되다시피 한 현대 정신의학의 모순이고 비극이다.

우발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대할 때 용기를 내어 그의 존재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글을 쓰다보니 실제로 그런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폭력적 존재가 되는 순간 사람은 상대의 극단적인 두려움 속에서 자기 존재감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는 걸 느낀다.


사라져 가는 '나'를 소생시키는 심리적 CPR

그래서, 저자는 심리적 CPR이라는 비유를 한다.

쉽게 말하면 그의 '나'에 초집중하고 그의 '나'를 자극해서 그가 '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소멸 직전의 나를 압박하고 자극해서 나의 이야기를 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물으라고 한다.

나는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자살 시도 즈음에 그녀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 일들이 그녀에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묻고 듣고 또 묻고 들었다. 그녀에게 집중하는 내 시선과 신음 같은 맞장구에 쿠션에 기대듯 그녀가 몸을 기울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심리적 CPR을 행해야 하는 정확한 위치도 알려준다.

심폐소생술은 심장 외 다른 장기들은 제쳐놓고 오로지 심장과 호흡에만 집중하는 응급 처지다. <중략> 심리적 CPR도 마찬가지다. 심리적 CPR은 '나'라는 존재 자체에만 집중해야 한다.

충조평판을 경계하라는 이유를 조금 더 알게 된다.

감정이 항상 옳다. '나'라는 존재의 핵심이 위치한 곳은 내 감정, 내 느낌이므로 '나'의 안녕에 대한 판단은 거기에 준해서 할 때 정확하다. 심리적 CPR이 필요한 상황인지 아닌지도 감정에 따라야 마땅하다.

생각이나 행동이 아니라 존재다.


생각은 나의 존재가 아니다

내 직장 이야기보다 직장에 대한 나의 느낌이 더 나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중략> 내 견해, 신념, 가치관이라 힘주어 말하는 것들 대부분도 사실 그 시원(始原)은 '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유입된 것이 대부분이다. 나처럼 보이지만 나 자체는 아니다.

자주 인용하는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이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듯이 보인다. 우리는 오히려 욕망을 이루는 느낌이나 감정에 다가설 때만이 비로소 고유한 인간 개체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 무엇이 내 존재냐?

내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살아 있다. 그에 대한 감정이나 빛깔, 파동, 굴곡은 늘 달라진다.

 

'충조평판' 날리지 말고 공감하라

나는 여전히 듣기에 약하고, 말로 비수를 던지는 습관이 켜켜이 남아 있다.

고통 속 상황에서 고통을 소거하면 그 상황에 대한 팩트 대부분이 유실된다. 그건 이미 팩트가 아니다. 모르고 하는 말이 도움이 될 리 없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안다고 확신하며 기어이 던지는 말은 비수일 뿐이다.

들으면서 상대의 감정을 느껴보려고 노력하면 될까?

노느니 장독 깬다고 충조평판이라도 날려보는 것이다. 그러니 끼니처럼 찾아오는 일상의 갈등과 상처가 치유될 리 만무하다. 덧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중략>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별로 필요치 않다. 그때 필요한 건 내 말이 아니라 그의 말이다. 그의 존재, 그의 고통에 눈을 포개고 그의 말이 나올 수 있도록 내가 그에게 물어줘야 한다.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려놓고 지금 그의 마음이 어떤지 물어봐야 한다. 사실 지금 그의 상태를 내가 잘 모르지 않는가. 물어보는 게 당연하다. <중략> 대답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존재를 주목하고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존재를 그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중략> 버벅대던 순간을 나는 방해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집중했다. 그녀가 불편해하는 것을 덜어준다고 화제를 돌리지 않았다. <중략> 자기 존재가 있는 그대로 수용되는 순간은 당사자가 누구보다 즉각적으로 감지한다. 생명의 본능이다.


누구나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 해보자.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중략>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지난 <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연재

1. 가족의 존재에 관심을 두는 행동하기

2. 우울과 무력감은 삶 그 자체일 뿐, 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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