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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Dec 05. 2022

분수에 맞게 잘 살기 위해 멈추기

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26

분수에 맞게 산다는 것

과거의 궤적이 팔자이다.

사람이 걸어온 과거의 궤적이 팔자이고 깜량이며 분수입니다. 사람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 궤적의 관성력을 저지할 만한 인과가 사람에게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2015년 고미숙 선생님께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명리학'을 배우기 전까지는 팔자는 그저 미신인 줄 알았다. 학교 교육을 비난하면서도 서양 교육에 충실했던 멍청이(?)가 아닐 수 없다. 팔지를 알고 나서는 쉽게 바뀌지 않는 팔자를 답답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스스로 노력하면 바뀌기도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내가 과거의 궤적을 바꾸고 새롭게 세상을 대하게 되었다고 느끼는 부분을 떠올려 어떻게 그 방법을 알았을까 물으면, 저절로 알게 된 듯하다는 점이다.


아마도 시골 농부님과 페벗[1]인 탓에 페벗이 된 현웅스님이 최근 쓰신 글을 인용한다.

만일 스님의 주장대로 사람 속에 도가 있다면, 스스로 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렇게 믿으려고 한다.


더불어 또 다른 스님의 글을 하나 더 인용하여 분수(깜냥)에 대한 이해를 더하고자 한다.

나는 종종 강의나 책에서 배운 내용을 맥락 없이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실상은 잘 모르는 내용을 전하려고 허우적대고 있다는 모양새를 깨닫고는 한다. 지난 시간에 배운 대로 실행모드에서 스스로 익혀야 내 것이 된다. 분수나 깜냥이란 (도와 더불어) 그렇게 내 것을 담는 경계를 이루는 장치일 수도 있겠다. 분수를 넘어서려고 하면 버겁지만, 분수에 의지하면 되니까 도리어 행동에 자유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확신은 없다.)


섣부른 생각을 의심하여 분수껏 잘 살자

다행히도 최근 경험들, 특히 일상의 작은 좌절의 경험이 아래 문장을 와닿게 한다.

자기의 섣부른 생각을 너무 신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은 생각보다는 몸에 무의식의 형태로 배어 있는 훈습을 더 강력하게 추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머릿속으로 '이렇게 노력했으니' 하고 빠른 결과를 기대하거나 상대의 변화를 기대할 때 좌절을 맞이한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좌절의 결과가 바로 나에게 해롭지는 않았다. 아니 해롭기는커녕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보내주는 물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기 분수를 잘 파악하여 훈습된 습관으로 인하여 받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자기 분수를 넘어서겠다는 망상에 이끌려 패착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좌절을 '분수 파악'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고통이 줄어들 수 있겠구나 짐작하게 하는 글이다.


고미숙 선생님의 명리학을 듣고 나면, 팔자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사람들은 장사꾼이거나 사기꾼이라고 느꼈다.

사람들은 좋은 팔자와 나쁜 팔자가 있다고 비교하며 판단하지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자기 팔자를 분수껏 잘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분노 자체가 되어라

분노 자체가 되는 일은 내게 굉장히 익숙한 일이다.

상황 자체와 하나가 되어 비교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시비호오 판단이 가능한 것은 대비 기능 때문이다.

프로그래밍을 즐기고 싶은데 기업환경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훌륭한 소프트웨어 공학 프로그램으로 무장한 전문 대학원 기획에 참여한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당시 2년간 나를 다 쏟아부었지만, 현실의 벽이 곤고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나는 처절하게 무너졌다. 하지만, 그렇게 좌절의 시간을 보낸 7개월 후에 다시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었고, 나는 그때 (책을 적극적으로 인용하면) 분노 자체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음으로 가득 찬 지금 이 순간이 전부라는 생각만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런 대비 기능이 멈추어 청각의 커다란 자극만 남을 뿐 고통은 없다.

그 후에 나는 5~6년의 세월을 집요하게 살았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허무하게 뒤를 돌아본 기억이 있다. 시골 농부님이 설명하려는 바와 내 경험에 분명 차이가 있겠으나 분노 자체가 되라는 말이 너무 익숙해서 과거 기억을 소환해 글로 남겼다.


어떻게 멈출 것인가?

존재를 가리고 있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사라지면 저절로 행복해진다고 유추하자. 그런 다음에는 생각을 멈추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위 문장에 밑줄을 쳤다.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가장 불행했던 순간에 멈춰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조금 알 듯도 하다.


주석

[1] 최봉영 선생님의 표현을 따라 '페친' 대신에 '페벗'이라 합니다.


지난 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연재

1. 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2. 무의식 변화 인식과 자기 언어 개발

3. 아주 간단한 깨달음 수행법과 믿음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

5. 깨달음은 무엇이고,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6. 생각에 끌려가지 말고, 생각을 다스리기

7. 동정일여 그리고 몇 주간의 배움

8. 문제삼을 일과 사라지게 둘 해프닝

9. 사고의 틀과 대의적 소프트웨어 설계 방안

10.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기발걸음

11. 홀로서기와 따로 또 같이

12. 깨달음을 전하는 일은 이웃사랑 실천

13.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

14. 사고지능의 한계와 자연의 특징

15. 쪽인 나와 무아론

16. 진리의 인식과 존재에 대한 주목

17. '나'와 무아無我의 공존

18. 감정을 바라보고 생각을 환기하기

19. 동영상뿐만 아니라 스틸 사진으로도 살아야 함

20. 무아는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21. 깨달음이 찾아올 때까지 생각 걷어차기

22. 의도된 훈련과 아기 발걸음으로 감을 잡자

23. 불필요한 생각 걷어차는 정성을 반복하자

24. 생각 걷어차기와 과학적 태도

25. 사회 문제, 야생 학습 그리고 공유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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