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4
지난 글에 이어서 <시골 농부의 깨달음 수업> 34쪽부터 시작하는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기록한다.
얼마 전에 페북에서 교회에는 예수가 없다는 글을 읽었다. 나는 (카톨릭신자지만) 교회에 예수가 있고, 절에는 예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더불어 절에 깨달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의 표현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혼란한 마음을 추스를 때 갖다 쓸 수 있는 철저하게 현생을 위한 지혜이다.
깨달음은 삶에 활용할 수 있을 때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하느님의 사랑도 마찬가지고)
얼마 전에 지인에게 말투에 대한 조언을 들은 바 있다.
자기 말의 앞뒤가 모순되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듣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다.
나는 말투에 대한 예절에는 그다지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만, 모순되게 아무말이나 하는 습성을 고쳐야 한다고 느낀다. 그저 말을 잘 못한다고 눙쳐서 뭉개지 말고, 대화할 때 상대에 대한 예의로 생각하고 정성을 들여야겠다.
최봉영선생님께 바로 여쭙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깨달음은 비언어적 차원의 현상이고 깨달은 사람은 언어적 차원의 현상이다.
하지만, 일단 스스로 소화부터 해보자.
깨달음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그 결과가 안도감으로 드러난다.
뒤이어 나오는 위 문장을 볼 때 나는 함께 연상되는 표현을 써보았다.
안도감 =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다
믿음을 갖는다
하면 된다는 안도감(혹은 자유)을 느낀다
깨달은 이후에 인간적 표현은 언어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나는 저자와 다른 표현을 썼다. 몸을 가진 나이기에 경험과 주관과 기억(또는 어휘력)에 따라 다른 말로 표현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깨달음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깨달은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써서 나타난 현상일 수 있다.
아래 문장은 내게는 마치 교회에 예수가 없다는 말처럼 느낀다.
깨달음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깨달음이 아니라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생각에 갇힐 수 밖에 없다.
생각에 기반하여 구축된 세계에서는 생각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생각은 인간의 뇌가 세상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제한적인 시스템이며 생각이 인식하는 세계는 인간이 우주를 받아들여 활동하는 유일한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쉽게 수용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월말 김어준>에서 박문호박사님 강의를 1년 이상 들은 효과다. 그리고 <팩트풀니스>도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팩트풀니스>가 사실 충실성을 갖추기 위해 내가 과학에 다가가도록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연기적인 일이라 정말 모른다. :)
언제였는지 분명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10년쯤 전으로 기억한다. 열정을 갖고 추구하던 구체적인 꿈이 사라지졌음을 느낀 일이 있다.
그는 무아를 달성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자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잠시 허무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빈 공간을 나는 자아실현으로 채웠다. 요즘은 잘 쓰지 않지만, 한동안은 지인들에게 내 꿈이 자아실현이란 말을 하고 다닌 시절이 있다. 그래서 위 구절이 무척 반가웠다. 고향을 만난 듯이.
저자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무아와 연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술된 대부분 책들의 저자는 모두 깨달은 사람들인가?
그리고 매력적인 단어로 탁월한 설명을 한다.
이해의 명백함이라는 문제가 남은 것이다.
초보 프로그래머와 고수의 차이처럼... :)
명백함이란, 그렇게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으며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어서 심리적 요동이 없다는 것이다. 경험의 문제이고 주관적인 상태다.
외우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매력적인 정의다. 그렇게 밖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니? 바로 일대일대응 아닌가?
점심 때 후배와 대화를 하며 어른스러운 행동에 대해 말했다.
그런 찌질함을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요동하지 않는 무아와 연기에 대한 명백한 이해와 심리적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힘이 되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자신의 행동과 활동을 개선하려고 노력이 일어나고 그 결과를 얻어 내는 사람이다.
나는 너댓번의 좌절을 통해서 어른스러운 행동을 어떻게 하는지 배웠다. 나의 한심함과 내면의 너덜너덜함을 극복할 때 단호함을 어떻게 갖추는지 배웠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생기는지도 역설적으로 최악의 좌절을 견뎌낸 후에 배웠다.
깨달음이 이미 모두에게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좌절을 견뎌낸 후에 그냥 알게 되었다.
최근에 #순리대로 를 말한 일이 있다.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조작하고 대처하지 않으며 모든 사건들에 대한 전적인 수용이 가능해진다.
어릴적에 교회에서 순종을 말할 때, 거부감이 들었다. 동시에 위선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교회에서 나에게 똑부러지게 설명해주는 이도 없었고, '말을 잘 듣는 태도'가 성경에서 말하는 순종은 아닐텐데 교회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은 그저 말을 잘 듣는 태도를 견지했다.
2015년 명리학(사주)을 배운 후부터 나는 운명을 믿는다. 그리고 때를 기다린다거나 순응하는 일이 너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제는 순종이 비슷한 말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너무나 멋진 말이다. 해보고 판단해야 한다. 그 전의 지식은 무가치하다.
지식이 명백해지는 과정은 효용성이다.
내가 좋아하는 말로 치환하면 '하면된다'.[1]
[1] 더불어 소프트웨어 릴리즈가 왜 중요한지도 함께 떠올린다. 사회적 가치를 확인하려면 내보내고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개인이나 만드는 사람의 효용성이 아니라 사용자와 이해관계자의 효요성을 따라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