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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Mar 25. 2022

빙산을 운행하는 일이 순리대로 사는 법인가?

진한 일상의 기록 No. 16

이 글을 어제까지 연재한 글과 전혀 무관한 글이다. 다만, 생각의 출발이 Chris Richardson의 글에 등장한 빙산의 일각 그림에 있다는 점이 같을 뿐이다.

그가 쓴 주제에 대한 관심 과 별개로 최근 동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정을 가능한 늦추라는 것이 언제까지를 말하는 것일까요?


As ~ As possible 이라는 패턴이 보이는 장면이다. 가능한 적게(little)와 가능한 늦게(lately)는 다르지만 둘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라도 있는 것일까? 내 머리를 이렇게 묻고 있었다.


빙산의 일각과 As ~ as possible

또한 크리스가 그린 삼각형은 내가 자주 인용하는 빙산의 일각과 매우 닮아 있었다. 아니 사실 나타내려는 뜻이 같다. 점점 미스테리(?)를 밝히고 싶어진다. 크리스가 말한 글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거기서 느낀 '혹시' 하는 느낌속으로 생각은 계속 간다.

위 빙산 그림은 <만남은 기회이니 기회를 여는 대화를 준비하라>편에 서 가져왔다. 만남에서 얻는 바를 빙산의 일각으로 묘사했다. 빙산을 떠올린 이유는 이전에도 밝힌대로 최봉영 선생님 말씀에 근거한다.

사람은 준비한 만큼 만나게 되어 있다.


그 글에 또 다른 그림이 있다. 삶을 선으로 만남을 점으로 묘사했다.

그림을 다음과 같이 바꿔볼 수 있다.

물 흐르듯 하라

위 그림을 그릴 때 문득 물 흐르듯 해야 한다는 순리를 뜻하는 말이 머리속에서 튀어나왔다. 직업이 우선인 나의 살아가는 꼴은 모든 배움을 소프트웨어 개발 현장이나 프로그래밍하는 내면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물 흐르듯' 이란 표현을 떠올리자마자 잊혀졌던 기억속의 경험이 떠오른다.

점을 찍어가며 말하듯 코딩할 때 느꼈던 짜릿함 (fluent API 활용)

코딩할 일도 없는데 한참을 들여다 보았던 Stream Programming 기술

비슷한 시점에 긴 시간 나의 삶의 태도를 훈련시켜준 애자일 특히 XP는 물 흐르듯 이라는 순리를 나에게 가르쳐준 교본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깨달음을 얻기 전에 쓴 아래 글 제목을 보면 전율이 흐른다.


<오늘의 문제만 우아하게 해결하기> 편의 제목에 전율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이유는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빙산의 일각과 오늘의 문제만 해결하기가 닮아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그러니 결정을 늦추라는 말도 오늘(혹은 지금) 결정해야 내용만 결정해야 한다는 말로 풀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최근 많은 영감을 주는 페친님의 글에서 본 표현이 떠올라서이다.

사람들은 지금보다 나아지려고
지금보다 좋아지려고
지금을 희생합니다.
그러나 나아지지도 않고
좋아지지도 않습니다.
영원히 지금을
희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지향적인 구조는
지금을 착취하는 허구입니다.
그러므로 나아지고 좋아지려고
지금을 희생할 필요가 없습니다.


빙산을 운전하기

그렇게 믿으면 아래 그림은 하늘에서 바라본 빙산의 일각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유유히 흘러가는 빙산!

아니 멈출 수도 있나? 죽으면 멈추는건가? 천천히 가면 조금 사는건가? 아니면 유유자적? 갖은 생각 중에서 내가 취하고 싶은 것은 이분법에 따른 방향성이다.

나는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정성스럽게 운전하고 싶다


이분법이라 말한 것은 운전을 할 것이냐 그저 되는대로 살아갈 것이냐에 대해 나의 뜻이 전자에 있다는 의미다. 동시에 모든 것을 내가 계획할 수 없다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순리를 이해하기

순리라는 말은 아주 오랫동안 해본 적이 없는 말인데, 최근 지인과 대화 중에 자주 사용한다.

과거에는 굉장히 좋은 느낌을 갖은 단어였다. 지금은 그게 어떻게 행동하여 얻는 것인지 조금은 알 듯도 하다. 내가 앞서 선상에 높인 점을 운전하겠다고 할 때, 갖은 태도와 느낌이 바로 그것이다. 2015년 우연하게 명리학(命理學)을 배운 일이 있다. 명리학이 사주를 다루는 것이란 점을 알았다면 아마 신청하지 않았을텐데, 호감있는 선생님이 가르치고 16명 선착순이라는 말에 달려갔다. 명리학을 배우고 난 후에 나는 이런 것을 운명이라고 불렀다. 운명(運命)에 따른다는 표현은 명리학을 배운 효과였다.


그러던 중에 중국에 가서 나는 운명에 따라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그때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 주재원이나 출장이 많아 북경 성당에서 예비자 교육이 3개월로 짧다는 말에 결정을 내렸다. 그때 나는 운명(運命)에 따랐다. 그리고 열심히 전례위원활동까지 하면서 3년 정도의 신자 생활을 한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언어 사용이 바뀌었는데 운명 대신 계시(啓示)에 따른다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실제로 나는 계시를 받는다는 느낌을 여러차례 경험했다. 다만, 그 경험이 교회에서 말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서 쪽지(메시지)를 던져주는 듯한 인상을 받는 장면들은 나에게 어릴적 봤던 만화 <형사 가제트>나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주인공이 미션을 받는 장면과 흡사하다. 뭔가 나에게 던져졌는데 밑도 끝도 없는 미션이란 생각을 종종 받았다.


이제 나에게 계시(啓示)란 말을 버릴 때가 되었다. 좋아하던 시리즈인 <미션 임파서블>도 이제 끝까지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요즘은 순리란 말이 입에 잘 붙는다. 내가 지향하는 그것과 일치감이 매우 좋다. 하느님과 일치한다고 기도할 때는 여전히 어색하다.


이쯤에서 제목을 붙이고, 그 질문을 마음에 둔 후 살아갈 것이다.


진하고 연한 인상의 기록

15. 역경에 대한 고찰, 그리고 역경 아스피린

14. 진화적 책장정리를 통한 실용독서 구조화

13. 책장 정리: 개선, 개선, 개선

12. 당신의 혁신 능력을 망가뜨리지 마라

11. 배움의 순간: 공부란 무엇인가?

10. 육아로 배우는 퍼실리테이션

9. 이분법의 활용

8. 육아란 무엇인가?

7. 운칠기삼 활용법

6. 저는 의지를 믿지 않습니다

5. 독서 전략에서 읽고 쓰기 전략으로

4. 함수를 일상 행동에 활용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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