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24
밑줄 친 내용 중에 한 문장만 끊어서 음미해보니 새롭다.
욕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욕망'하면 내가 기계적으로 인용하는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이다.
헌데 최봉영 선생님에 따르면, 인간은 <지각에 따른 욕구와 생각에 따른 욕망>을 갖는다. 욕망을 빼고 나면 우리에게 지각에 따른 욕구만 남는다. 다시 시골 농부님의 글을 이어보자.
그러니 욕망이라는 허상의 괴물이 있다고 속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생각 이외의 다른 어떤 거창한 것이 있어서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읽을 대는 욕망을 분명 감지할 수 있는데, 왜 허상이라고 할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이 만들어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주말에 가까운 어른이 우리 아이에게 '그렇게 행동하면 부모님이 창피하단다'라고 말했다. 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한 말은 '안 창피한데 왜 저렇게 말하시지'였다. 그건 그저 그분의 생각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최봉영 선생님의 그림을 따라가면 그분의 생각이 '아이의 행동에 영향을 미쳐야겠다'는 욕망으로 바뀌고, 다시 도덕규범으로 해석되어서 자신 있게 말씀하신 듯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바라는 것의 시달림은 내가 생각으로 끌어온 함정입니다.
최근의 경험이 아래 문장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현재 진행 중인 생각이 욕망을 일으키지만, 세뇌, 암시, 무의식적 조건화 등의 형태로 이전에 심어놓은 것이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렇게 변장한 생각은 이겨낼 수 없는 거대한 본능의 힘인 척 위세를 부리지만, 결국 그 근본은 한 쪼가리 생각의 작용일 뿐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내뱉은 생각의 힘에 부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주로 가까운 사람에게 비난을 받아 불편한 감정이 올라올 때, 바로 말로 대응하는 대신에 가만히 지켜보는(?) 식의 행동 혹은 그냥 견뎌보는 행동을 하고 나서 '강한 힘'과 같았던 무언가가 알고 보니 그냥 스치는 것이었다고 느낀 일도 있는 듯하다. 마치 구름으로 흐린 하늘이 시간이 흘러 푸르게 된 듯 말이다.
다시 한번 생각에 대한 의심의 중요성을 배운다.
뇌 속에 이미 고정되어 버린 감각과 관념들을 신처럼 믿고 숭배하지 말고 의심해야 합니다. 이 의심이 뇌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도구입니다.
그렇다고 타인에 대해 의심을 더 할 생각은 없다. 내 생각에 대한,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각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이 필요하다.
흥미로운 질문이고, 자칫 모호할 수 있는 질문에 대한 명쾌한 가이드다.
새로운 시선을 따르는 창조적 전개의 가능성을 펼치는 것이 깨달음의 결과적 현상이고 사회적 효용입니다.
나는 2014년 선택 이후에 깨달음(?)을 써먹는 방향으로 살아온 듯도 하다.
'그렇지' 하고 읽으면 줄 친 내용이다.
밥 먹고 똥 싸는 인과는 엄중한 연기의 과정으로 나름의 진리적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 체계에 대하여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보니 <고요를 창출하기 위한 몸 관리>도 떠오른다.
2020년 이후[1]에는 성경도 읽지 않는데 시골 농부님 책은 읽는 이유다.
진리에 대한 탁마는 과학적 태도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 단체의 말은 종종 신비주의에 해당한다면 아인슈타인의 말이 신비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현상이 신비 아닌 것이 없지만 신비주의는 결코 신비가 아닙니다.
아래 문장을 보니 나의 첫 번째 멘토가 첫 번째 본보기였다.
현상계를 지금과 전혀 다르게 살아갈 가능성을 개척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내가 '깨달음'이라는 느낌에 가까운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독려한 이는 사람이 아니라 XP라는 책이 아니었나 싶다.
의심을 거두지 않고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낸 자칭은 스스로 인과를 만들어 없던 힘과 지혜도 불러옵니다.
일정 부분은 경험한 듯도 하다. 내 입장에서는 주변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무심했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관계에 대한 노력을 하면 도리어 안 보이던 내 모습이 보이거나 그들의 존재로 인해 내가 하지 못하던 일을 하고는 했다.
아래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전에 썼던 글을 떠올렸다.
과학의 특징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신앙을 버린 이유가 등장한다.
신앙에 배타성이 동반되면 폭력과 차별이 동반됩니다.
신앙이 '사적 진리'라는 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는데...
신앙은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사적 진리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대비하여 과학은 공적 진리라고 할 수 있으며 기술의 소유 문제가 일어날 수는 있겠지만, 이해에 차별이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다.
신앙은 여러 가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하여 인류의 사회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달한 현대에 신앙은 이제 할 일을 마쳤습니다.
신앙을 할 일을 마쳤는지에 대한 견해는 없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신앙이 사회악에 가까운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신앙화하지 말고 신비로 내버려 두는 것이 진리를 대하는 바른 태도입니다. 일반화의 오류를 피하지 않으면 그 부작용을 반드시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반화의 오류'라는 표현을 보니 <당신이 옳다>에서 오는 읽은 구절에서 우리의 대화 상대자를 섣불리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지 말고, 고유한 그 사람으로 받아들이라 한 교훈이 다시 나를 찾아온다.
과학적 태도란 타인과 사회를 배려하는 소통의 자세입니다. 주관적 앎이 갖고 있는 사적 진리의 한계성을 인정하고 소통의 대상인 타인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과학적 태도와 신앙을 비교하는 위 문장은 당연히 그 맥락이 <당신이 옳다>와 다르지만 상통하는 면이 있다. <당신이 옳다>에서는 섣불리 '충조평판'을 하지 않고, 소통 대상의 마음(감정)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의 마음을 몰라주고 '충조평판'을 하는 행위가 바로 소외다. 또한, 자신의 앎이 갖고 있는 한계성을 모르고, 섣불리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함정에 빠지는 것일 수 있다.
[1] 2019년까지 대략 3년 정도의 기간에는 북경 한인 성당에서 독서단으로 전례 활동을 하며 성경을 열심히 읽고 종교활동도 했던 이력이 있다.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
10.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기발걸음
11. 홀로서기와 따로 또 같이
13.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
14. 사고지능의 한계와 자연의 특징
15. 쪽인 나와 무아론
17. '나'와 무아無我의 공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