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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Sep 09. 2022

가족의 존재에 관심을 두는 행동하기

<당신이 옳다>를 읽고 배운 내용 실천하기

2019년 일독을 했지만, 실천과는 아직 거리가 먼 <당신이 옳다>를 다시 샀다. 이번에는 기록을 남기고 (선언으로 쓰고) 작은 실천이라도 해보자.

가족에게 무심한 행동을 고쳐보자

아래 내용을 읽고 반성을 했다.

어릴 때는 학교를 하루만 결석해도 선생님이 연락을 하던 게 우리의 일상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런 연락 없이 동료가 나오지 않아도 그냥 명부에서 지워버리고 마는 시대다.

학창 시절부터 가족에게 무심했던 내 행동을 결혼할 때까지 고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아이를 낳으니 가족이 2차원으로 바뀌었다. 내가 가장인 가족에 대해서는 노력을 하는데, 눈에서 멀어진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무심한 점은 습이 되어 굳어질 지경이다.


그래서, 당장 카톡방부터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며 형광펜 칠을 한 책을 다시 읽어 보니 장 제목이 '사람을 그림자 취급하는 사회적 공기'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무관하게 사는 삶의 방식을 돌아본다. 나에게는 심각하지 않은 주제다. 그러나 내 가족으로 확장하면 '그렇다'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존재에 대한 주목이 삶의 핵심

두 번째 읽는 데도 존재에 대한 주목이란 표현은 멋지지만 경험과 바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

진짜 자기에게 주목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느낀다. <중략> 존재에 대한 주목이 삶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우연하게도 3월 즈음 사정이 있어 누군가에게 비슷한 느낌을 주는 행동을 한 듯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그 상황에 도달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다시 같은 사람을 만나도 재연을 할 수 없다. 다행스러운 점은 가까운 지인 중에 비슷한 행동 양식을 보이는 분이 있다는 점이다.

내 존재 자체에 반응한 사람이니 그 사람만이 내 삶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 <중략> 마음의 영역에서 그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여전히 관념적으로 이해한 듯하나 행동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래 문구에서 나가 나라면, 사실 나는 주기적으로 (마음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법을 터득한 듯도 하다.

방전되고 꺼져가는 '나'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중략> 내게 필요한 도움이 어떤 것인지 그 실체를 아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그게 '남'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죽기 전에 어릴  가족들에게도 무엇인가 해보기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행위는 어설프지만 아내를 보고 따라 하며 떠듬떠듬 익혔다.

엄마도 전문가인 의사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만 집중했다. <중략> 누구든 제일 먼저 할 일은 아이에게 눈을 포개고 아이에게 묻는 것이다. 가장 시급하고 핵심적인 어른의 반응이 그것인데, 모두가 그것을 건너뛰었다. <중략> 아이의 고통을 알게 된 순간 전문가를 검색하기 전 엄마가 할 일은 아이에게 먼저 묻는 것이다.

하지만, 대상이 어른이라면 아직 잘 모르겠고, 굳어진 습관 탓에 머뭇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그렇다'라고 단념하기엔 오랫동안 방치해둔 여동생이 겪는 고통에 대해 (죽기 전에) 무언가 노력을 해보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고통이 아무 관심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외면되지 않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배웠다. 모든 것은 한순간이니 살아 있을 때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머뭇거림은 많지만)


방치했던 동생의 고통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다.

만약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아예 없앤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울증 진단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의료 산업과 제약 산업의 규모가 이미 천문학적 규모여서 현실에선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상상만으로도 빼앗겼던 땅을 찾아 돌아오는 사람처럼 나는 자유로워진다. 어떤 면에서는 고통받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한 여름 나뭇잎처럼 많아지는 느낌도 든다.


맺음말

서툴더라도 생각만 하지 말고 무언가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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