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농부의 깨달음과 나의 깨달음 17
책 247쪽에 등장하는 장의 제목인데, 나를 마음 편하게 해주는 표현이다. 모순적인 상황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대해 처음 들을 때 물질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모순적인 말로 설명을 시도하던 이야기와 비슷한 인상도 받는다.
지난 글에서 '진리는 모든 현상 자체이다'라는 문장이 주는 혼란을 잊고 모순을 받아들이라는 듯도 하다. 진리의 관점에서는 나는 무아이고, 생각이 주체일 때는 자아가 바로 '나'다. 나는 진리의 일부로 존재하기에 둘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편하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관념적일 뿐이니 행위로 옮기기 위해 다시 시골 농부님의 텍스트로 돌아가자.
무아란 생각이 소멸된 상태이며, 조금 더 세밀하게 설명하자면 '나'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 상태이다.
무언가에 몰입했을 때를 말하는 '무아지경'으로 체험과 연결할 수 있지만, 그런 체험은 빈도가 잦지 읺고 시간이 길지도 않다.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되면서 '나'에 대한 관찰과 염려가 일체 사라지는 상황인데 이런 경우들도 무아이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객관에 집중하느라고 '나'와 관련된 생각들이 사라지는 순간들도 무아이다.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압도적인 풍광에 사로잡혀 넋을 빼앗긴 상태도 무아이다. 한 생각이 끝나고 새로 다른 생각이 시작하기 직전까지 찰나의 공백도 무아이다.
몇 가지 경험들이 떠올랐는데, 그중 하나는 특별한 기억이다. 북경에서 일하던 중에 조직의 성장에 온전히 집중하려고 하다 보니 스스로의 효능감을 느끼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걸까?' 하는 혼란스러움이 나를 압박했고, '효능감을 발휘해야 한다는 강박'같은 것이 나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이후 나는 몰입 상태와는 아주 다른 어색한 상태를 견뎌냈는데, 조직 관점에서 '무아'를 구현하는 기간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리송한 말이다. 공존이라는 제목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무아는 생각과 같은 차원에 있지 않으므로 생각의 여집합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은, '나'가 존재적 관점인데 반해 무아는 인식적 관점이라는 것이다.
무아는 존재가 아니지만, 인식할 수는 있다고 이해해야 할까?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신기하게 반가운 기분이 드는 그런 문장이다. 자꾸 읽어서 그런 걸까?
진리는 그런 쳇바퀴에서 벗어난 것이어서 <중략> 진리는 이미 그러한 것이지,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경지가 아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직접 무엇을 얻는 것은 아니다.
무아를 이해한 깨달음은 직접적으로 쓸데가 없다.
그렇다면, 생각인 '나'와 무아가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일까?
이 문장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신이 옳다>에서 배운 지식 혹은 그때의 느낌들이 소환된다.
욕망, 고통, 불안은 잘못이나 부족함 또는 죄가 아니다. 인과에 의하여 당연히 생멸하는 것인데 그것들을 타파해야 할 과제로 여기는 것은 오직 생각의 색칠일 뿐이다.
<당신이 옳다>에서는 즉각적으로 충조평판(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는 사회적 관습을 타파하라고 말한다. 그 대신에 존재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 바로 책 제목이기도 한 <당신이 옳다>이다.
무엇을 해도 다 옳다는 말인가? 아니다. 시골 농부님 글로 <당신이 옳다>의 주장을 다시 해석해보자.
욕망, 고통, 불안은 잘못이나 부족함 또는 죄가 아니다.
그러니 내 감정은 옳다. 진리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뒤이어 이어지는 행동은 인과관계를 갖고 나와 내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이 역시 진리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나'에 달려 있다.
여기서 나는 다시 내가 <나를 차리는 언어 사용법>에 관심을 두는 이유를 돌아본다. 시골 농부님을 따라 배우다 보면 '나'를 내려놓아야 할 듯한데 '나를 차리는 일'은 모순된 듯한 생각도 들었다.
한동안 혼란스러웠지만, 방금 전에 아래 문장을 쓸 때 결심했다.
인과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나'에 달려 있다.
가능하다면 앞으로 '차린다'는 표현을 위 맥락으로 보기로 한다.
지킬 것이 바로 떠오르고, 버릴 용기가 없는 나는 보통사람이다.
보통사람들과 달리 지키고 유지할 것이 없어져서 자유로운 것이다. <중략> 그것들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부분이 공존함을 아는 것이다. 욕망, 고통, 불안의 연기의 과정이고 그 바탕은 무아라는, 명백한 현실을 살아간다. 깨달은 사람은 '나'와 무아의 완전한 공존에 기반을 두고 사는 사람이다. 별개의 차원이기는 하지만 '나'와 무아가 늘 함께 한다.
그래도 이전의 나보다는 자유로워졌고, 지금의 상황을 인연의 결과로 보아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4. 깨달음과 깨달은 사람
10. 주체와 객체 그리고 아기발걸음
11. 홀로서기와 따로 또 같이
13. 생각의 노예가 아닌 주인 되기
14. 사고지능의 한계와 자연의 특징
15. 쪽인 나와 무아론